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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책상
  • 보라색 히비스커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15,120원 (10%840)
  • 2019-06-18
  • : 1,294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 있다. 엠네스티 월드에서 수여하는 인권상을 받고 독재 정부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하는 언론사를 운영한다. 종교 단체 뿐만 아니라 자신과 연결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거액의 돈도 아낌없이 기부한다. 명절이나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그에게 도움을 받아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이들의 인사와 보답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그는 토속어를 사용하는 것을 교양없는 것으로 여기고 반드시 정식 발음을 준수하는 영어를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믿고 따르는 것에도 특정 방식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전통 신앙을 유지하는 삶은 이교도, 우상숭배로 취급하고 말을 섞는 것도 불결하게 여긴다. 무엇보다 자신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가족들은 죄악을 선택한 것으로 보고 그 대가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 벨트로 채찍질을 하고, 뜨거운 물로 발을 지지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발길질을 하고, 테이블을 사람 위에 던지더라도, 이 모든 행위가 끝난 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든 것이 너를 위해서야'

이렇게나 모순적인 인물이 어떻게 가능한가.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으면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가장 큰 질문이었다.

종교와 언어, 문화적인 면에서 아버지 유진이 내세우는 기준들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특히 89페이지에서 캄빌리의 외할아버지를 회상하며 백인들의 방식이 곧 '올바른 방식'이라고 되뇌이는 장면을 참고하면 그는 완벽한 사대주의자이자 백인우월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민주주의도 백인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추종하게 된 것은 아닐까? 나이지리아가 지켜온 토속적인 문화가 덜떨어지고 백인의 방식으로 계몽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런 짐작 말고는 그를 이해할 길이 없었다.

캄빌리네가 어디서부터 잘못 꼬였는지 알 수 없는, 모순덩어리로 가득찬 꽈배기 같은 가정이라면 자랐다면 이페오마 고모네는 직선으로 가득한 가정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고, 하고 싶은 것이 하면 된다. 웃는 것이 자연스럽고 웃는 것만큼이나 싫은 걸 싫다고 말하고 투닥거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집. 잘못한 일이 있으면 혼이 나지만 혼나는 시간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다음에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설명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 길다. 캄빌리와 자자는 은수카, 즉, 이페오마 고모네 라는 전혀 다른 공간을 알게 되면서 처음으로 베베 꼬인 꽈배기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한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한 가정의 가장 깊숙한 속내를 낱낱이 드러내면서 그 속에 담긴 부조리와 모순을 보여줌과 동시에 나이지리아 사회의 모순까지 그려낸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불안정한 정치, 현실이 이어지는 와중에 권력자에 반대하는 교수들은 강제해고를 당한다. 이페오마 고모도 그 중 한 명으로 협박에 시달리다 나이지리아를 떠나게 된다.

"왜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도망쳐야 해? 왜 고칠 수는 없는 거야?" 아마카가 물었다. (...) "도망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거지." - 281페이지

"고학력자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떠나. 약자들을 남겨두고 가지. 독재자들은 계속 군림해. 약자들이 저항하지 못하니까. 너는 이게 순환고리란 걸 모르니? 대체 누가 이 고리를 끊겠어?" "그건 궐기대회에서나 먹힐 비현실적인 얘기잖아요, 치아쿠 이모." 오비오라가 말했다. - 296페이지

우리 주변의 부조리와 모순을 끊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비오라의 대사들이 날카롭게 가슴에 꽂혔다. 그래서 책을 덮고도 더 많은 질문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타이밍을 놓치고, 약자들만 남은 곳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캄빌리는 꽈배기처럼 꼬여있던 실타래를 풀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자자의 변해버린 눈빛은? 미국생활은 정말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모순을 품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당연하게 해오던 것과 조금 다른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습하고 외로운 베란다의 공기, 차갑고 축축한 히비스커스의 느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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