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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에는 상징과 은유로 읽어낼 수 있는 장치들이 여럿 등장한다. ‘제국’과 ‘제국의 변경’이라는 지역, 감옥과 야생의 환경이라는 공간 뿐만 아니라 치안판사와 줄 대령, 눈 먼 그녀, 만델 준위 같은 인물들처럼. 그 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작품 전체를 끌고가는 목소리의 주인공, 치안판사 ‘나’였다. 작품에서 그는 유일하게 입체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는 시간은 치안판사 ‘나’를 얼마만큼 믿고, 동조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과 같았다. 그의 대사와 행위들을 보면서 ‘나는 그에게 이만큼 동조한다’고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치안판사 ‘나’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도 그만큼 많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제국의 변방에서 지정된 구역을 잘 다스리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의 생활은 업무 이외에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가득했다. 그 중에서 하나가 ‘폐허를 발굴하는 것’이다.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폐허를 발굴해내는 데 다양한 인력과 시간을 쏟아붓는다. 발굴해낸 결과도 대단할 것은 없지만,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잔재들을 보면서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공간이 사실은 어떤 의미였고, 과거에는 어떤 행위들이 일어난 곳이었을지 마음껏 상상하는 행위가 그에게 의미있는 시간으로 보인다.
치안판사의 면모를 설명해주는 또 다른 장면은 새끼여우를 키우는 장면이다. 그는 사냥꾼에게서 작은 은빛 새끼여우 한 마리를 산다. 야생 동물인 여우가 판사의 공간에 적응할 리가 없었지만 방생하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윗층에 가둬주고 보살핀다. 새끼여우가 하루 종일 가구 밑에 웅크리고 숨어있으면 치안판사를 모시는 직원들이 여우의 배설물을 치우고 먹이를 준다. 여우의 시큼한 오줌 냄새가 아래층까지 느끼면서도 그는 ‘여우가 어서 커서 내보낼 때를 기다린다’고 읊조린다.
폐허를 발굴하고, 새끼여우를 키우는 장면은 이 작품을 통틀어서 그가 가장 많은 정성을 쏟아붓는 ‘그녀를 보살피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치안판사는 고문을 당한 뒤 가족들을 잃고 거리에 버려진 그녀를 발견하고 자신의 숙소로 데려온다. 그곳에서 따뜻한 공간과 일거리를 제공하는 대신 그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그녀의 발을 씻겨주는 것. 처음에는 그녀의 발을 씻겨주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 점차 그녀의 온몸을 씻겨주는 것으로 발전한다. 매일밤 반복되는 이 행위가 성관계로는 이어지지 않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홀경’을 느낀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녀를 씻겨주며 황홀경을 느끼는 이 장면들이 이상한 불쾌감을 불러왔다. 작품 속 주변 인물들도 수근거린 것을 보면 둘의 관계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그녀에게 살기 좋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대신 그가 황홀경을 얻는 과정이 불편한 것은 왜일까? 치안판사의 행위가 애정이나 연민에서 비롯되기보다 강요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둘의 관계에서 그녀가 완벽한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제대로 볼 수도 없고, 그 외에도 건강 상태가 양호하지 않다. 가족을 잃었고 머물 곳이 없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다. 반면에 치안판사는 행정구역 내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거리에서 처음 ‘가자’고 말했을 때 그녀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치안판사는 폐허를 발굴해내고 새끼여우를 키우듯이 그녀를 데려와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에게는 그런 일들이 자신만의 제국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는 이런 행위를 스스로 ‘보살핌(p.58)’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치안판사가 제국의 반대 입장에 서서 야만인을 보살피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그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인물로, 줄 대령이 처음 시찰을 나왔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주장한다. 소년과 잡혀 온 죄수들이 줄 대령에게 고문을 받고 난 후에도 망을 보던 병사들에게 당시 상황을 캐묻고, 눈 먼 그녀를 위해 수행대를 꾸려 사막 너머로 그녀를 돌려보낸다. 사막 언덕에서 그녀와 동족으로 추정되는 무리를 만났을 때, 치안판사는 그녀에게 ‘스스로 선택해서’ 도시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단호하다. “싫어요.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p.119)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녀를 자신의 제국에 가두었나.
희랍어에서 ‘야만인’의 어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자들’, 혹은 ‘미확인된 적’을 뜻한다고 한다. 존 쿳시가 영감을 받았다는 콘스탄틴 카바피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는 집단이 쉽게 ‘적’으로 삼는, 해결책으로서의 야만인을 보여줬다면,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는 조금 더 입체적인 인물인 ‘치안판사’가 더해져 우리가 기다리는 ‘미확인된 적’의 존재가 더욱 복잡해진다. 작가는 소설의 배경을 특정 국가가 아닌 ‘제국’이라고 명명하면서 이것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공간임을 암시했다. 이에 더해 치안판사라는 인물을 통해 제국은 외부의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자신만의 제국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 것 아닐까? 치안판사는 졸 대령을 ‘적’이라고 명명(p.188)하고 자신의 제국을 다시 찾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야만인’은 누구일까. 오늘, 당신의 제국은 안녕한가.
"대령님, 무사히 귀환하기를 빕니다." 그는 마차의 창문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숙인다. 나는 말을 몰고 돌아온다. 짐을 벗어 홀가분한 느낌이다. 내가 알고 이해하는 세계에 다시 혼자 있게 되어 기쁘다.- P27
매듭은 안에서 엉켜 있고, 나는 그 끝을 찾을 수 없다.- P39
잡혀온 적들을 신사적으로 대하라는 케케묵은 규범 외에 내가 옹호하는 게 뭐란 말인가? 그들 자신이 보기에도 혼란스럽고 치욕스럽게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죽이는 새로운 형태의 타락상을 제외하면, 내가 반대하는 게 뭐란 말인가?- P178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이야기하는 진실이다.-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