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p.26.
  • 채식주의자
  • 한강
  • 10,800원 (10%600)
  • 2007-10-30
  • : 57,521
  어리석고 캄캄했던 어느날에, 버스를 기다리다 무심코 가로수 밑동에 손을 짚은 적이 있다. 축축한 나무껍질의 감촉이 차가운 불처럼 손바닥을 태웠다. 가슴이 얼음처럼, 수없는 금을 그으며 갈라졌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만난다는 것을, 이제 손을 떼고 더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도 그 순간 부인할 길이 없었다.

(247쪽, 작가의 말)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묘하게 타이밍이 맞는 책이 있다. 이상한 난독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단숨에 이 책을 읽어버린 것도 그때문이었다. <낙하하는 저녁>, <우연한 여행자>가 그러했고 <채식주의자>가 그러하다.
  말도 안되게 끔찍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나의 취향을 생각해보면, 개연성 조차 느껴지지 않는 플롯이 한강의 글 속에서는 이해가 된다.책 표지의 처음에 보고 위화감이 들정도로 싫었던 에곤 쉴레의 그림마저도 그녀의 글을 읽고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네 그루의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 한 명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누군가는 그의 죽음을 방관하며, 누군가는 매료된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또 다른 이는 죽음으로 가려는 충동을 막고 있다.
  섬뜩하지만, 괴롭지만 그래도 읽을 수 있었던건 어딘지 모르게 글이 쓸쓸했기 때문이다.  네 그루의 나무 중 나는 무엇과 가장 닮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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