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여자들의 빨간책
람바 2010/07/18 19:42
람바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 푸르른 틈새
- 권여선
- 10,800원 (10%↓
600) - 2007-07-27
: 543
"주로 타인의 발음을 통해서만 귀에 익은 내 이름을 직접 내 입으로 말하고 소개하는 것은 낯설고 계면쩍은 경험이었다. '자기소개'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유년의 수동성을 넘어 당당히 내가 바로 아무개라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매번 정겨운 방식으로 일깨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지고 독립된 개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 그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자기소개라는 절차는 일종의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개자는 자기 이름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히 발음해야 했고, 듣는 청증은 소개자가 임의로 요약한 그 혹은 그녀의 존재성을 강제로 받아들여야했다. 자기소개는 소극적인 자들이 도태되고 적극적이고 용감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계로의 입사식이었다. 불리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부르심을 유도하는 방식,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한시바삐 소비하도록 이름을 세일하는 방식이었다. "(22~23쪽)
"될 수 있는 한 양껏 모든 일반명사가 되고자 하는 내 욕망은, 허무를 견디기위한 혹은 허무를 견디지 못하는 백과사전적 발버둥이다. 나는 내 꿈의 문법을 원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나는 양(量)에 들려있다. 나는 내 꿈이고, 내 과거이고, 내 현재이고, 내 모든 것이 되고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와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고유한 내 자신이다. 혹시 내게 고유한 것이 있기나 했다면. 설혹 없었다면 그 고유한 없음조차도 이 와중에 흔적 없이 사라진다. 나는 '내 모든 것'이 되고자 하지만 남은 것은 '내'가 떨어져나간 것, 즉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일 뿐이다.
곰보유리문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새벽, 젖은 방에는 닥치는 대로 짓이겨진 이름들만이 가득하다."(152~153쪽)
"나는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갔다. 마루에는 아버지가 채워놓은 씁쓸한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크고 분명하게 울렸다. 아나운서는 끝 어절을 약간 높여 뒤에 따라오는 어절들에 은근히 의미를 유착시키려는 교묘하게 훈련된 억양을 구사하고 있었다. 저런 목소리의 남자가 주정하는 걸 듣는다면 무척 역겨울까 어떨까, 나는 의미 없이 생각했다. "(160~161쪽)
"이야기는 자신의 상처만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있는 불행한 인간을 임시로 치유하는 장치이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내 과거의 불행도 그다지 엄청난 것은 아니로군,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끄덕이는 순간에 불행했던 왕은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 속의 한 불행으로 환치하고는 거리를 두고 그 불행을 바라보는 것이다." (173쪽)
"치킨수프를 한술 뜨면서 나는 가난한 부부처럼 냄비를 믿기로 했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밖의 다른 것들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설령 모든 것이 한층 더 나빠진다 하더라도 나는 말을 믿고, 기억을 믿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믿을 것이다. 닫히지 않는 이야기, 닫히지 않은 믿음, 닫히지 않은 시간은 아름답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완의『아라비안나이트』처럼, 북극을 넘어 경계를 넘어 스스로 공간을 열며 뛰어가는 냄비처럼, 상처로 열린 우리의 몸처럼, 기억의 빛살이 그 틈새, 그 푸르른 틈새를 비출 때 비소소 의미의 날개를 달고 찬란히 비상하는 우리의 현재처럼……" (280~281쪽)
*
읽는 내내 키득키득, 음흉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잔뜩 숨을 죽이고 웃는 내 모습은, 밤 늦게 방 안에서 혼자 야한 비디오를 보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모습과 비슷했다.
신경숙은 섬세한 감정을 말도 안되게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서 감성을 건드린다면 권여선은 직설적으로,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담아서 적나라하게 말해서 부끄러울 정도였다.
솔직한 감성을 있는 그대로 적는 것, 이것이 권여선의 글이 아닐까. 이런 여성적인 책을 신강사님이 추천했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난 즐겁다. (신강사님♥)
그녀의 글을 양껏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아주 많이 행복했다.
PC버전에서 작성한 글은 PC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