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p.26.
  • 침이 고인다
  • 김애란
  • 13,500원 (10%750)
  • 2007-09-28
  • : 9,723
"학원은 2년 정도 다녔다. 그사이 나는 바이엘 두 권을 떼고, 체르니와 하농에 입문했다. 체르니란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란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 (15쪽)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노선표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 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 불이 켜졌다.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 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 말로 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 지 7년이 다 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땅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방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구파발에도, 수색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서울의 크키가 컸던 탓이 아니라, 내 삶의 크기가 작았던 탓이리라. 하지만 모든 별자리에 깃든 이야기처럼, 그 이름처럼, 내 좁은 동선 안에도――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118쪽)

 

  "오랫동안 나는 그런 곳에 가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그렇게 힘들게 찾아간 곳이, 애쓰며 보고자 했던 곳이, 고작 어느 작은 방, 어두운 '빈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꼭대기에 떠 있는 빈 곳. 사각의 텅 빔을 찾아 그렇게 길고 굽이진 길을 헤매 올라갔구나 하고. 나는 그 '네모난 부재'가 지금도 섬처럼 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혹은 내 머리 위를 따라다니며 먹지처럼 출렁이고 있지 않을까 하고. 셋방에서 때가 되면 터진 곤 하던 펑―― 소리. 그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소리 역시 거기서 아직 저 혼자만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문득 펑――이라는 말은 뻥――이라는 말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 '풍(風)'들이, 골목 같은 내 핏속을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툭―― 하고 들어가 또 다른 말을 튀우는 소리처럼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사라진 말과 사라진 기억, 끝끝내 알 수 없거나 애초에 가져본 적 없는 장면,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같이 느껴지는 풍경과 함께, 무언가 실종된 것들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먹고 자란 것을 아니었을까."(219~220쪽)

 

*

 

  이미 운명을 달리한 이들이 아닌, 지금을 살고 있는 이들과 감성을 나누는 독서란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내가 타고, 걷고 있던 도시의 지하철과 꾸불꾸불 골목길 사이로 김애란의 이야기가 있다.

  2호선을 타고가다 한강을 볼때마다 마음이 환해져 늘 웃는, 경기도민적인(유난스럽고 다소 촌스럽다고 지적받는) 나의 행동마저도 그녀와 함께 나누니 퍽 기분이 좋아졌다.

  <아비가 달린다> 이후로 말괄량이 소녀같던 그녀의 글은 이제 어엿한 20대 아가씨가 되었다. 그 사이에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굳이 취향을 나누어져보다면 난 <아비가 달린다>의 김애란이 더 좋았다. 아직 어른이 되기 싫은 나의 치기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김애란의 글과 함께 20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작지 않은 행복으로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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