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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 병들어 누우신 지 삼 년에  
뒷산의 약초뿌리 모두 캐어 드렸지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병드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아침이면 찾아와 울고 가던 까치야      
나 떠나도 찾아와서 우리 부모 위로하렴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앞서가는 누렁아 왜 따라나서는 거냐      
돌아가 우리 부모 보살펴 드리렴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좋은 약 구하여서 내 다시 올 때까지
집 앞의 느티나무 그 빛을 변치 마라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작사,곡 김민기



노래가 안 나오면 http://blog.naver.com/likeamike/150012526693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게, 서울은 욕망의 표상도 입신출세를 향한 돌파구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태어났고 사는 곳, 고향이라기보다 동네로 한정되는 나를 둘러싼 환경의 큰 이름이었다. 하지만 서울은 누군가에게, 줄줄이 딸린 동생들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농사에 매달리는 부모를 위해 좋건 싫건 입성해 살아내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도 일곱 살까지 살림을 돌보며 나를 키워준 이른바 '식모' 언니가 있었다.

 2002년의 가을 혹은 겨울이었을 것이다. 마치 구전가요처럼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던 노래가 낯선 얼굴의 이방인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브라운관 속, 방글라데시에서 온 삐뿌씨는 이 노래를 참 구성지게 잘도 불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없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간다. 그리고 그 '서울'에서는 살 수가 없어 아우성을 친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조용한 선율에 실린 가사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수사일 뿐, 이따금 누군가의 삶에서는 차마 꿈도 꿀 수 없는 게 되어버린다. 

 오늘은 내가 일하는 단체의 송년회 날이었다. 11월 1일부터 이 곳에서, 나는 벌써 꽤 많은 이주노동자를 만났다.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 계기는 93년 가을에 본 한 편의 연극이었지만, 이후에 '느낌표'를 통해 좀은 선정적으로 그리고 대상화와 타자화의 방식으로 강렬하게 각인된 탓에 나는 지금의 일을 오래 마음에 두고 마침내 선택했다. 미디어나 지면을 통해 전해진 그들의 현실은 온통 한국인으로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어느새 그들은 내게 약하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로 내면화되어 버렸다. 봅시도 그들을 만나 친절을 베풀고 돕고 싶었지만, 내 사는 주변 어디에서도 나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부천의 도당동 그 중에서도 각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밀집해 살아가는 강남시장 인근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나는, 이제 수시로 그들을 만나고 때로 너무 많은 그들에 둘러싸인다. 물론 일방적인 대상화와 타자화를 통해 내면화된 이미지는, 온전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새로운 올가미를 둘러씌우는 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하며, 한편 그들 모두가 '서울로 가는 길'을 부르던 삐뿌씨로 이미지화된 선량하고 약하고 눈물나는 존재는 아니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결국 사람의 일은 대체로 상호작용이며, 그야말로 사람 나름이라는 안이하고 뻔한 결론이 이미 내려져있는 것도 같다.

 송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부천역에 내려 버스를 기다리다가 한 외국인을 마주쳤다. 시내버스 터미널을 배회하던 그는 어설픈 한국말로 행선지를 대며 버스번호를 물었다.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진 부천역의 복잡한 버스 시스템은 외국인은 물론 내게도 꽤 헷갈리고 번거로운 것이다. 차마 혼자 그냥 보낼 수가 없어 전철 역사를 넘고 지하도를 건너가야 나오는 정류장을 일러주느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었다. 파키스탄에서 온 그는, 미처 예기치 못한 친절(?)을 만난 탓인지 눈을 빛내면서 좋은 사람이라며 커피, 시간, 돈 따위의 단어를 주워삼켰다.

 버스 타고 가려면 시간이 늦었다고 일축했음에도 그는 불쾌할 정도로 집요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유앤미 어쩌고 폰 넘버 어쩌고 하는 덕에 순간 무척 곤혹스러워져서 냉랭하게 다시 거절을 했지만, 처음 부천에서 일하냐는 내 물음에 회사체인지 어쩌고 했던 말이 떠올라 명함을 주고서 커피 말고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쥐어줬다. 불과 십여 분, 처음보다 한결 냉정해진 나의 태도에도 아랑곳 없이 그는 명함을 꼭 쥐고 웃었다. 일러준 대로 버스 정류장을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서려니 어쩐지 금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천에 처음 와서 길거리에서 이주노동자들 마주치면 나는 항상 표정관리에 신경을 썼다. 워낙 드러운 인상이라 쉽지는 않지만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가식적인 웃음이나마 보내려고 노력하며, 대다수 한국인들이 그들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을 만회해보려는 딴에는 유치한 안간힘이었다. 주제 넘고 웃기지만, 대체로 소외감과 고통에 시달릴 그들에게 눈빛으로나마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은 주접질이기도 했다. 언젠가 페이퍼 인터뷰를 위해 만난 버마분에게 우스개처럼 이야기했다가, 부천역 앞에서 그러면 외국인들이 만만하게 보고 오해한다며 그러지 말라는 말에 무안해졌을 따름이지만 말이다.

 일상적으로 만나기 힘든 친절 앞에서 커피 시간 돈 따위를 입에 올리며 연락처를 물어온 파키스탄 노동자에게 갑자기 냉랭해진 것은 어쩌면 문득 그 생각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온 지 1년이 되었다는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이방인인 그에게, 나는 처음 만난 친절한 한국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역시 사무실에서 만나 사연을 알고 친해진 낯익은 이주노동자들과 다르지 않은 '서울로 떠나온' 사람일텐데, 나는 왜 그렇게 쓸데없이 냉정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딴 마음을 품었을 리는 없건만, 괜히 미안하고 머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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