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남은 세 귀퉁이를 헤아리지 않으면 다시 일러주지 않는다."
계발(啓發)의 어원이 되는 이 문장은 교사로서 공자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신분 구분이 있던 시절, 공자는 파격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면 신분에 차등을 두지 않고 다 받아주었다. 오히려 그의 기준은 ‘얼마만큼 공부에 진심이냐‘에 있었다. 마음에 무언가가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을 어찌 펼치면 좋을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공자는 창구를 내주었다. 이것이 계발(啓發)의 ‘계(啓)‘다. 계(啓)는 손으로 문을 열어주는 모양이라, 이 문장에서는 왕성하지만 나올 방법을 몰라 분주하기만 한 것이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발(發)‘은 활을 당겨 쏘는 모양으로, 곧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지만 아직 미숙하여 안달 나 있기만 한 것의 활시위를 당겨주는 모습이 떠오른다.- P128
공자에게 계발이란 출세를 위한 것도, 명예나 재산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뜻은 있지만 자기 안에 갇혀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세상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혼자서 안달복달하던 마음이 세상과 만나며 감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본래 《논어》에서 쓰인 ‘계발‘의 의미는 오늘날 자기 계발의 용법과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 자기 계발의 초점은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그렇게 하면 진짜 뭔가 달라질 거라고, 더 나은 내일을 살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내가 하는 말과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오직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주위 의 관계 없이 혼자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가깝다.- P129
공자의 충(忠) 역시 마찬가지다. 충(忠)과 서(恕)는 각각의 의미보다 이 둘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서(恕) 없이 충(忠)은 불가능하다. 상호성을 맞이한 뒤에야, 그러니까 이로운 상황이든 불리한 상황이든 나의 마음을 상대의 입장에 위치시킬 줄 안 뒤에야 자기 진실성은 가능하다. 공자식 자기 계발은 시장이나 상품성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것, 우리가 서로에게 의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자장에서 성찰하고 움직이는 것, 그럼으로써 스스로에게 진실되고 충실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식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우리는 적극적으로 자기 계발을 해야 했다. 그것은 나만의 뛰어난 점을 부각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간 내가 배워왔던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시장에서 우리는 판매되어야 했지만, 팔린다고 꼭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과를 내는 과정은 우리가 고립되지 않고 세상과 만나 감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충실하고 서로에게 의지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매몰되는 대신 새로운 다른 길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가 글을 쓰고 세미나를 조직하는 과정은 서로에게 부단히 기대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글이 완성될 때까지 성심성의껏 서로의 마감을 독촉했고, 매번 안경을 고쳐 쓰며 멤버들의 글이 골격을 갖추어가는 과정과 부적절한 표현을 수정하는 과정에 동참했다. 세미나 진행을 위해서는 다른 멤버들이 함께 움직여줘야 했다. 서로 겹치지 않는 시간대를 잡기 위해 양보하고, 커리큘럼을 함께 검토하며 책을 추천하고, 세미나 규모가 커지면 함께 들어가서 공동으로 튜터 역할을 하기도 했다.- P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