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그랬다
심장은 폭스바겐 만하다. 혀 위에 코끼리를 올려놓을 수도 있다. 몸무게는 고양이 3만 마리를 합쳐 놓은 것 만하다. 혈관은 소방호스 굵기다. 이 정도 힌트면 아시겠는가? 답은 고래다. 북방혹고래의 고환은 무려 1톤이다. 창피 당하지 않으려면 그 앞에서 지퍼를 함부로 내릴 생각을 마시라. 흰긴수염고래는 한번 사정에 1350리터의 정액을 방사한다.(1000리터가 1톤임을 상기하시라.) 아무리 잘 단련된 무사라도 고래를 당할 자는 없다. 호랑이의 송곳니도 매의 발톱도 고래 의 덩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양은 또 하나의 질이다.
맞짱과 싸움에도 엄연히 규칙과 논리가 있다. 주먹 쥐고 싸우는 판에 곡괭이나 삽자루를 휘두르는 건 치사하고 몰염치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몰염치한 일을 아무렇지도 감행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인간이다. 초음파추적장치, 전자장치와 신무기...테크놀로지의 위엄을 앞세워 자연에게 별별 가공할 만한 짓거리들을 감행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 씀씀이, 그런 건 없다. ‘나’라는 존재의 복지 이외엔 관심이 없다. 철저한 자기중심주의요, 치졸한 소아병적 태도다. 성장주의는 그들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이란 부제가 붙은 엘린 켈지의 『거인을 바라보다』는 우리를 데리고 저 깊은 심해로 들어간다. 고래의 폐활량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지만 고래를 따라가는 그 여행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범고래 새끼 수컷은 지독한 마마보이다. 평생 어미 고래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한 번 출산에 한 마리만 낳고, 70살 수명에 13살까지 젖을 물리는 고래, 새끼가 포경선에 잡혀가면 포경선을 이마로 들이 받는다. 모성도 체구만큼 지극하다. 향유고래가 해마다 바다에서 먹어치우는 먹이의 양은 8천만~1억톤, 이는 인간이 전세계 어장에서 건져 올리는 것보다 웃도는 양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고래는 이토록 어마어마한 몸집으로 진화했을까? 책은 그 해답의 단서를 말해준다. 쥐처럼 작은 동물은 신진대사율(단위질량당 소비되는 에너지)이 너무 높아 음식을 찾아 멀리 돌아다닐 수 없지만, 몸집이 커지면 신진대사율이 낮아져 양질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책은 바다가 사실 영양학적으로 풍부한 곳이 아님을 말해준다. 고래도 식량난에 허덕인다는 이야기. 몸집이 커서 게을러 보이지만 먹이를 찾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고래는 하루에 150킬로미터를 이동한다. 쇠고래는 멕시코만에서 북극까지 2만킬로미터를 여행한다.(지리산 종주는 이런 여행 앞에서는 세 발의 피다.)
‘고래, 몸집만 컸지 미련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착각. 많은 인류학자들이 문화는 모방에서 시작되고 학습으로 전파된다고 했다. 엘린 켈지의 책은 고래 역시 인간처럼 어엿한 문화적 존재임을 말해준다. 오스트레일리아 샤크베이에 사는 돌고래는 도구를 사용한단다. 호모파베르, 도구적 인간이라는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사실 이 자존심은 일찍이 침팬지들이 흰개미를 잡기 위해 나뭇가지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관찰한 영장류 학자, 제인구달에 의해서 무참하게 깨진 바 있다. 아무튼 샤크베이의 돌고래들은 해저에서 해면동물을 뜯어내 주둥이에 물고 독가시가 있는 스톡피시를 사냥한단다. 해면동물이 독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한 보호장구로 탈바꿈되는 순간이다. 재미있는 것은 고래들이 이 ‘해면동물 사용법’을 어미 돌고래에게 배운다는 점이다. 본능이 아닌 학습에 의해서 말이다.
병코돌고래는 평생 사용할 자기 이름을 ‘휘파람’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호모 로퀜스, 언어적 인간의 위상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혹등고래의 뇌에서 발견된 방추신경세포는 오직 인간과 대형유인원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이 세포는 사회적 조직력과 공감능력, 화술, 타인에 대한 직감, 사랑과 감정적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부분이란다. 어쨌든 병코돌고래가 사랑의 아픔을 안다고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병코돌고래가 감정도 없는 단순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다. 뿐만 아니라 고래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아무리 영리한 고양이라도 어림없는 일이다.
북대서양의 사르가소에 사는 암컷들은 교차양육의 사례를 보여준다. 한 마리의 새끼가 여러 마리의 암컷들로부터 젖을 얻어먹는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 어미와 새끼의 폐활량은 차이가 난다. 향유고래가 한 번 잠수해 바닷속에 머무는 시간은30~45분. 어떤 고래들은 1시간이나 잠수한다. 이때 엄마가 깊이 잠수해 들어갔을 때 어린 새끼들은 누가 돌보겠는가. 바로 이모와 할머니와 같은 모계집단이다.
진화이론 중에 ‘할머니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동물은 죽을 때까지 생식이 가능한데 어째서 인간은 일반적인 동물과 달리 45세 전후에 폐경을 맞이하고, 더 이상 생식할 수 없음에도 70세 정도까지 장수할까를 추측하는 이론이 '할머니 이론'이다. 답은 이렇다. 인간은 어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다른 동물보다 길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낳았다가는 자식이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을 때까지 제대로 지켜줄 수가 없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아이를 낳는 일이 위험해 진다. 이 때문에 나이가 들면 직접 아이를 낳기보다는 이미 낳은 자식들이나 손자들을 보살피는 것이 같은 유전자를 가진 후손의 수를 늘리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 할머니 이론은 고래의 모계사회를 설명하는 데도 유효하다. 고래 연구 학계에서는 고래의 학습이 고래들의 모계사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고래의 행동양식은 모계에 따라 결정되며 같은 집단에서 소리, 생존 방식, 육아 방법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책은 말한다. “ 연장 사용은 어미에게서 딸에게로 문화적으로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한 마리가 어떤 도구를 사용해 그들 사이에서 화젯거리가 되고, 다시 다른 돌고래들이 이 행동을 모방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해양포유류가 야생에서 서로에게 도구 사용법을 알려준다는 증거다. 즉 그들이 문화를 가졌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
바다에는 파도 소리와 새가 우는 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없을 것이라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고래가 고래를 부르는 소리는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 바닷속은 수많은 소리들의 창고다. 고래들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듣는다. 고래들의 뇌 속에서 음향을 담당하는 부분은 인간의 것보다 10배 이상이나 된다. 그만큼 소리의 감지가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닦달하기의 명수’인 인간은 이런 사실을 섬세하게 고려할 여유가 없다. 폐수만 바다에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해안 개발, 선박 운송, 석유 탐사에 따르는 엄청난 소음을 바다에 쏟아 붓는다. 소리를 이용해 해저 공간을 인식하고 먹이를 찾는 고래들에게 음향 스모그는 심각한 문제다. (바다에 가서는 기침도 조심스럽게 할 일이다.) 남김없이 바닥을 훑고 지나가며 먹이를 싹쓸이 해가는 해저저인망 사용도 문제. (고래들이 펄펄 뛰는 건강한 바다를 볼 수 있으려면 인간의 먹이를 조금 양보해도 되지 않을는지.)
딱딱한 이론을 들먹이고 시시콜콜 그 증거를 대느라 여유가 없는 남성적 글쓰기와는 달리 서사와 이론을 여유롭게 버무리는 엘린 켈지의 여성적 글쓰기는 고래라는 대상을 부드럽고 유머스럽게 조망한다. 엘린 켈지와 함께 망망대해와 심해를 고래의 폐활량을 빌어 떠돌아 다녀보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