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자기 선택권에 대해
율리시즈 2025/01/2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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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기다리다
- 리 코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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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 - 2025-01-22
: 510
동양에서도 그러했지만 서구에서 흑인을 도구처럼 부리던 노예제는 긴 시간 이어져 왔으나 결국은 철폐되었다. 법적으로는 없어졌다고 하겠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인종차별등의 방식으로 그 여파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결국엔 사라질 것이다. 지금 당장엔 불합리해 보이는 여러 제도들조차도 존속과 폐지의 여부는 그 사회 공동체의 의식 성장에 달려 있다. 불합리한 제도라도 그 제도로 인해 이익을 보는 이들이 있는 한 그 제도는 오래 가겠지만 그럼에도 가치와 정의심이라는 의식이 충분히 전파되는 시기가 되면 옛 제도의 폐지와 새 제도의 시작은 이어진다.
리 고토미 작가는 '출생합의제'라는 독특한 개념을 제시한다. 임신한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이 사회에 나오고 싶은지를 아기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태아가 이를 찬성하면 출산이 이루어지고 이를 거부한다면 낙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인권이 아직도 정착되지 않은 현재의 단계에서 이와 같은 '태아권'은 매우 생소한 개념이다. 당연하게도 이와 같은 가정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근 미래에 나올 수 있는 개념으로는 상상해볼만 하다.
리 고토미 작가는 소설 <너를 기다리다> (번역 서지은, 도서출판 마르코폴로, 원제: 생을 축하하다)에서 근 미래에 일어날 법한 소재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다뤘다. 이를 장르로 분류하자면 하드 SF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근 미래에 일어나기는 커녕 아주 먼 미래의 가능성조차 생각하기 쉽지 않은 환타지 SF에 비해 리 고토미의 <너를 기다리다>는 많은 명작 하드 SF가 보여주듯이 다가올 미래의 논제를 미리 소환한다. 과학이 지금보다 더 발전하고 인류의 평균의식이 지금보다 더 성장한다면, 뱃속의 태아가 어떤 결정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삶의 주체권을 주어지게 하려는 것이라는 설정은, 지금은 터무니없어보여도 한번 상상해 볼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두 손으로 받기 위해 기다리는 염원을 담은 듯한 소설 표지의 장면은 그 자체로 매우 인상적이다.
<너를 기다리다>는 지금부터 수십년 후의 어느날 일본의 두 동성애 여성이 아기 출산을 염원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출산을 위해 태아에게 초음파로 의견을 물어볼 수 있는 단계가 되었고 출산 여부는 전적으로 태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이 출산을 전후로 한 두 여성과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궁금증을 자아내며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내러티브 상으로 보자면 더 길게 가져가도 충분한 상황인데도 리 고토미 작가는 약간의 긴박감을 담아 팽팽한 전개를 이어간다. 이야기의 전개와 재미와 긴박감이 조화롭게 구성되었으면서도 현실로 보더라도 논쟁적인 이슈가 이어지면서도 결국엔 감동을 선사한다.
리 고토미의 <너를 기다리다>는 형식은 SF이지만 내용은 의식의 진화와 사회제도의 바람직한 조화와 정착이라는 화두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소설이다. 이 쉽지 않은 주제를 수려한 이야기로 풀어가는 작가의 역량이 놀랍고 SF의 소수 덕후만을 위한 작품이 아닌, 문학을 좋아하는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보편성을 담고 있기에 더욱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언급하기도 하지만 언어학자 촘스키의 보편문법처럼 리 고토미의 작품은 다소 특수해 보이는 소재를 보편적인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이 서바이벌 장르한계에 닫혀있지 않고 자본주의의 보편적 문제인 경쟁과 계급 갈등을 다룬 것과 다르지 않다.
다소 추리적인 설정, 반전의 요소와 기승전결의 전개는 독자를 충분히 끌어들이고도 남을 것이다. 현상에 대한 판단유보와 다양한 묘사, 열린 결말 등이라는 고도의 문학 전개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아쉬울지 모르나 이또한 취향과 방식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볼 때 충분히 받아들일만 하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처럼 사회 이슈적인 방식의 소설은 이런 르포적 전개가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독서토론모임에 가장 어울리는 소설로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출생권'과 '사망권' 등을 비롯한, 이 소설에서 제기되는 여러 이슈들이 토론의 소재로 너무나 잘 어울린다.
<너를 기다리다>에서 제기하는 '태아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보자면 신의 뜻 혹은 섭리 혹은 자연의 질서라고 불리우는 주제를 인간문명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가져오는 문제에 속한다. AI의 발전에 비추어 보자면 인간은 신의 영역에 한 걸음 더 들어서는 문제인 셈이다. 인간 의식이 충분히 진화하지 못하면 신의 영역을 가져오더라도 혼란과 불안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인간 의식이 충분히 성장했다면 신의 영역에 한 걸음 더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전개란 신비의 영역에서 합리의 영역을 넓히고, 미신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을 넓히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이런 신학적 철학적 근본 개념과 상관없이 이 소설은 일상에서의 소재를 바탕으로 재밌고 흥미진진하게 풀어간다는 점에서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이 원작을 바탕으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도 기대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금봉'이라는 대만 출신의 인물이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리 고토미'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소설을 낸 지점도 흥미롭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과 경계의 문제, 성소수자를 비롯한 여러 마이너리티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낳는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정체성과 경계의 문제를 겪는 모든 작가가 뛰어날 수는 없겠지만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로 <빛 속으로 (번역 김석희, 녹색광선)>라는 뛰어난 소설을 남긴 김사량 작가라든가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 받았지만 미국에서 영어로 <파친코 (번역 신승미, 인플루엔셜)>를 쓴 이민진 작가나 <작은 땅의 야수들 (번역 박소현, 다산책방)>을 쓴 김주혜 작가를 연상케 한다. 이들 작품들이 모두 비슷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보다 자아의 정체성에 고민한 예술가들이 작품으로 표현한 정점의 어떤 부분들을.
서지은 작가는 이전 번역작품이었던 쓰시마 유코의 <빛의 영역>처럼 자신의 삶과 전혀 별개로만 볼 수 없는 작품을 택하여 한국에 소개했다. 수려하고 시의적인 번역은 번역가의 능력이지만 작품들과 자신과의 공감대가 가느다란 실처럼 공명으로 연결되어 설득력을 더했을 것이다. 여러 책을 내면서도 재미와 의미심장함을 동시에 선사해주는 도서출판 마르코폴로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바로 지금의 한국처럼 사회제도가 합리적으로 민주적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때고 반동은 일어날 수 있다. 이 반동의 망령은 개인의 체험이나 트라우마와 같은 생존 부분과 연결되어 있을 때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한다. 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 살균의 방식이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소통과 해원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의식은 늘 성인 수준으로 앞서가거나 짐승 수준으로 뒤처지거나 하는 존재들이 상존하기 마련이지만 이들 모두는 그 자체로 귀하다. 건강한 상식의 주류가 이끌면서도 소통과 해원을 놓치지 않는다면 덜 떨어져 보이는 존재들조차 건강한 문명의 보금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나아갈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타자 존재의 문제가 심각해 보이더라도 바로 해결하기엔 여러 근원적인 문제들이 있는만큼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단기적인 처방은 처방대로, 장기적인 풀어감은 풀어감대로 이어가야 한다. 실은 지금 당장 완벽해 보이는 제도조차도 미래에서 되돌아보면 오점 투성이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소설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 속에서도 이를 빠져나갈 숨구멍을 열어두는 것, 뒤쳐져 보이고 한심해 보이는 타자의 의식이라도 무시하고 단절할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토론하며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고 키워가는 것, <너를 기다리다>에서 이런 의미를 발견한 것은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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