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와 본성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율리시즈 2024/07/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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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오기傳
- 김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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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 2024-05-14
: 8,872
김미옥 작가의 <미오기傳>은 유례를 찾기 쉽지 않은 책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위해 조선시대 박지원의 <허생전>까지 거슬러가야 할까요. 유머와 희극과 비극과 한탄 등이 골고루 있고 분명 본인의 얘기를 하는 책임에도 자서전도 아닌 것이 전기도 아닌 것이 생명을 지니고 살아 움직이는 책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출생부터 현재까지 단선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이뤄진 사건을 통해 느끼게 하는 상황에의 풍경화와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미오기傳>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인물들과 사회를 통해 돌아보는 세계의 점묘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제대로 읽는 독자는 금새 느낄 것입니다. 김미옥=미오기는 아니라는 것을요. 그러나 이 두 캐릭터가 전혀 다르다고는 또 말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소재로 글을 썼으나 놀라운 정도로 적정한 거리두기에 성공합니다. 김미옥과 미오기를 아주 떨어뜨려 놓지도 않고 초근접시키지도 않음으로써 자기 객관화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킵니다. 곰탕에는 여러 재료가 들어가겠지만 오랜 시간 푹 고아낸 그 요리는 들어간 재료자체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이미 곰탕을 만드는 이의 손맛과 요리철학이 들어가 있습니다. '활자 곰국 끓이는 여자'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미오기傳 >은 '김미옥'이라는 인물의 치열했던 삶에서 벗어나 몇차원 이상의 시선을 통해 '미오기'라는 캐릭터로 재탄생합니다.
김미옥의 치열하고 지극한 삶은 미오기의 넉넉하고 유연한 시선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김미옥의 삶에는 에고가 자리잡고 있지만 미오기의 삶에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에고는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본성은 이타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이 어쩔 수 없이 자리잡고 있겠지만 자기객관화의 과정을 긴 시간 이뤄내는 존재는 에고와 본성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겁니다. 결국에는 에고와 본성이 별개가 아님을 깨달을 때가 올 겁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주의 시간만큼 길고 긴 영혼의 여정을 걸어가는지도 모릅니다.
고대 시절부터 자아탐구 혹은 자기주시를 통한 삶의 수행은 오랜 역사가 존재합니다. 근래에 와서 메타인지라고 하며 자기객관화 등으로 일상화된 용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은 보편적인 수행론이 대중으로도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객관화는 어렵고 메타인지는 인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감정의 관찰자'로 높은 시선을 유지하기보다는 '감정의 주인공'으로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쉽고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지혜의 잠언들이 있고 무엇보다 예술과 문학이 있습니다. 지혜의 잠언은 온전한 수행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이들에겐 바로 본론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혼의 나이가 아직 채 되지 않더라도, 소명의식까진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더라도 자아의 중심을 에고보다는 본성의 시선으로 점차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때가 옵니다. 예술과 문학은 그것이 중요함을 여러 형태를 통해 알려줍니다. 우리가 미처 시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뿐이지 주위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예술과 문학은 늘 이정표를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니체가 얘기했듯이 '신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해석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이라는 정의 자체가 죽지 않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는 것과 대비되어 말이지요. 신은 죽었다고 할때의 신은 죽거나 말거나 스스로는 신경쓰지도 않습니다. 그저 인간들이 중세시절 이전엔 신이 모든 것인냥 숭배하다 르네상스 등을 거치며 신의 인간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었음을 선포한 것 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신의 이름을 빙자한 사제들이 영성도 희박한 채로 인간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로 행사하다가 점차 인간문명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자리를 내어준 것이지요.
그렇기에 사실은 영성이 빠진 형태의 종교나 제도나 도그마는 그 극심한 폐해를 생각한다면 차라지 죽는 게 나으며 신이 주류 이데올로기로 행사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영성이 충만한 이들은 표면적으로든 아니든 사제나 보살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형교회의 권력세습이나 큰 사찰의 주지쟁탈같은 것에 아랑곳 않고 하루 한끼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밥을 제공해 주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이 표면적인 사제보다 육신을 입은 천사와 보살에 가깝습니다. 이들은 물질의 재물보다 영혼의 봉사가 더 오래 가고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이들입니다.
진정으로 예술과 문학을 하는 이들에게 종종 사제라는 비유를 드는 것은 결코 억측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시문명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자연과 멀어지고 영성과 멀어집니다. 예술과 문학은 찐 사제들과 더불어 우리의 잃어버린 중심, 잃어버린 영혼,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 올라가도록 도와주는 사다리와도 같습니다.
김미옥 작가는 장점이든 단점이든 이쁜 것이든 흉물이든 가리지 않고 스스로의 삶과 주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더 넓은 시선으로 돌아보고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자아의 진화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영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남자에 비해 취급도 못 받고 태어나는 것조차 희박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기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취업전선에 바로 뛰어들어 가족까지 챙긴 삶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주변독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로 산다는 것은 인간승리를 넘어 거듭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겁니다. 문학의 전도사, 문학의 사제 역할은 자연스럽게 소명의식을 지니게 된 작가에게 부여된 훈장과도 같습니다.
문학이 어떤 거창한 목적을 위해, 말하자면 잃어버린 영성을 되찾아주는 역할도 한다는 점에서 도구로 본다거나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한다는 오해는 없길 바랍니다. 문학은 문학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할 때 이미 그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김미옥 작가처럼 오랜 시간 삶으로부터 독서로부터 세계의 이해로부터 이어온 긴 시간의 곰탕같은 진국을 내어 놨음에도 스스로 뻐기지 않고 간략하고 소박하게 그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여유는 문학의 재미가 얼만큼 다양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 바탕에 우리는 더 넓은 시선과 본성을 항해하는 의식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지니게 될 겁니다.
어린 시절 두 할머니의 흔한 예명을 고상한 한문이름으로 지어준 면서기를 통해 '인생도처 유상수'를 배울 수 있으며, 젊은 시절 가장 힘든 시기에 기둥서방에게 두들겨 맞았던 밤의 여자가 차려준 소박한 김치찌개 밥상을 받으며 '인생도처 유선인'을 배울 수 있습니다. 김미옥 작가는 자라면서 여러 이들에게 받았던 것을 글을 통해 대중에게 되돌려주는 문학의 보살과도 같습니다. 남에게 뱉은 침은 자기에게 돌아오며, 남에게 준 꽃은 자기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별과 행성들만이 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연도 돌고 돕니다.
아무런 대과나 큰 계산없이 문학의 독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한다는 정신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희생이나 봉사라는 생각조차 없이 활동한다면 결국엔 더 큰 결실로 돌아올 겁니다.
물질적 체험이 간절하거나 어린 영혼들에겐 인생에 심각한 과제가 잘 주어지지 않습니다. 편안하고 부유한 곳에서 경험을 누리기에도 바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래된 영혼, 성숙한 영혼일 수록 가히 인생의 과제라고 할 만한 숙제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물질적으로 결핍되고 인간적으로는 주위에 나쁜 놈들과 사기꾼들이 그득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영혼은 결국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고 시장통에서 도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백세시대에 <미오기傳>의 등장은 절반의 인생을 보여준 셈이니 후반의 <미오기傳 2>를 위해서라도 부디 슬기롭게 모든 것을 넘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완벽해서 살만한 것이 아니라 부족함 투성이고 좌충우돌과 시행착오의 역사가 자신의 삶의 대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충족하느라 모든 삶을 보낸 존재보다는 노력하느라 방황하는 영혼으로 인해 모든 삶을 소진해버린 존재가 역설적으로 결국에는 웃을 수 있습니다.
재물은 자아와 함께 갈 수 없지만 영혼의 경험은 자아 속에 스며들어 우주의 품에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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