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삶을 살피고 같이 살아가며 보듬는
율리시즈 2024/05/0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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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
- 허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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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 - 2024-03-29
: 105
[그늘의 삶을 살피고 같이 살아가며 보듬는]
- 허향숙 시집 -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 2024, 천년의시작>
허향숙 시인에게 있어서 존재란 조명을 받지 않아도, 두드러지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고, 삶이란 이들을 살피고 같이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 이는 무위의 삶과도 닮아 있으며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내밀하며 빛나지 않으나 은은하다는 점에서 유위의 삶을 넘어간다.
<그리움의 총량>에 이어서 두번째 시집인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는 허 시인의 문학적 역량과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연히 볼 수 있는 작품집이다. 삶과 존재를 바라보는 허 시인의 시선은 굳건하되 더 부드러워지고 넓어졌다. 작가에게 있어서 두번째 작품은 의미심장하다. 작품의 정체성과 방향성에다 자전적인 요소까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첫번째 작품집에서는 대개 특유의 고유성만이라도 담고 있다면 신선도 지수로 인해 좋은 인상과 점수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두번째 작품집에서 작가는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다. 이 시험은 사실 외부적 시선보다는 스스로의 내적 시선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다. 허 시인처럼 관찰의 눈과 자기 객관화가 잘 준비된 이들은 이 시험을 기꺼이 치룰 것이다.
'슬픔이 흘러왔다
흐르게 두었다
분노가 돋아났다
돋게 두었다
기쁨이 엎질러졌다
그냥 두었다'
- <무애를 살다> 중에서
무애를 사는 것은 갇혀 있지 않은 삶을 의미할테지만 감정의 주인공이 아닌 감정의 관찰자로 사는 것과도 같다. 이는 자기 관찰, 자기 객관화로 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유위적인 삶이 아닌 무위적인 삶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넓은 시선, 통찰의 시선은 여기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태풍은 나비의 날개에 꼭꼭 숨고
소란은 고요에 꼭꼭 숨고
어둠은 빛에 꼭꼭 숨고
슬픔은 기쁨에 꼭꼭 숨고
고통은 환희에 꼭꼭 숨고
울음은 웃음에 꼭꼭 숨고'
- <숨바꼭질> 중에서
그렇기에 태풍과 나비의 날개는, 소란과 고요는, 어둠과 빛은, 슬픔과 기쁨은, 고통과 환희는, 울음과 웃음은 서로의 반대말이 아니라 서로의 짝을 이루는 앞면과 뒷면임을 알려준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서 보자면 이분법적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과 감정들은 억지로 불러 들이거나 반대로 피해야 할 것들이라기 보다는 다가오는 것들을 겪되 그것에만 빠지지 말고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과도 같다. 겪음을 피함으로써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겪음을 지나감으로써 순수함의 중심으로 더 갈 수 있는 의식의 진화를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미 한 마리
보리 한 알 물고
담벼락 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오르고
떨어지고
다시 오르고
.....
보리 한 알 물고
일생을 두고
넘
어
가
는
거야'
- <넘다> 중에서
그러므로 의식의 진화는 통찰의 시선을 이루고 더 넓은 시선을 이룬다. 인간에게 있어서 개미의 삶은 하루살이와도 같을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이는 영원한 삶을 사는 신이 100세도 채 못 사는 인간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미와 이보다 못 해 보이는 미생물조차도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는 필수 존재라고 믿는 이들에게 어느 하나 하찮은 존재란 없다. 인간에게 인생의 과제는 개미에게 보리 한 알 물고 벽을 넘어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처럼 넓은 통찰의 시선을 지닌 이에게 미생물이나 개미나 인간은 각자 의식의 진화에 어울리는, 스스로가 부여한 일생의 숙제를 하나씩 넘어가려고 애쓰는 애뜻한 존재들이다. 한때 개미였으나 인간이 된 존재가 개미를 바라보고, 한때 인간이었으나 신이 된 존재가 인간을 바라보면서 육신에 갇혀 있지 않은 넓은 시선으로 가고자 하는 의식의 진화를 멈추지 않는 한 언젠가는 신의 시선을 지니게 될 것이다.
'옷처럼 생을 벗고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
삼십 년 전에 벗어놓은 생 꺼내 입으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하다가'
- <옷처럼 생을 벗고 입을 수 있다면> 중에서
전생이 봉인된 삶은 옷처럼 생을 벗고 입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봉인의 기억이 해제되는 순간에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옷을 벗고 입듯이 흘러왔음을 알 때가 올 것이다. 실제로는 옷을 벗고 입듯이 삶이 흘러왔으되 옷을 벗고 입는 생을 또다시 바라는 것은 봉인된 삶에서 근원적으로 욕망할 수 밖에 없는 역설이다. 이 바램으로 인래 삶은 더 치열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이 삶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내던져진 삶의 알리바이를 얼마든지 주장하더라도 도피하지 않는 치열함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장도 못한 채
생략된 나 때문에
울지 말아요
.....
천 년을 떠도는
바람의 몸짓으로
나 여기 있어요
당신의 숨 속에'
- <나, 여기 있어요> 중에서
짧은 생을 살든 긴 생을 살든 육신의 삶은 우주의 영원성에 비하면, 아니 그보다 훨씬 수명인 태양이나 지구에 비하더라도, 심지어 수백년을 살아온 소나무보다도 부질없다. 그러나 부질없는 순간의 삶은 그 자체로 지금, 여기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체험 삶의 현장이므로 전혀 하찮지가 않다. 참척의 비극이라는 굴레에 갇히지 않고 문학적인 승화를 시키는 과정은 먼저 저승으로 떠나간 이가 가장 바라는 바였을 것이다.
지난 생은 길게 살았으니 이번 생은 짧게 살아볼께요. 지난 생은 내가 부모였으니 이번 생은 내가 자식이 될께요. 다음 생은 친구로 만나요. 언젠가는 풀 한포기 새 한마리가 되어 당신 앞에 나타날지도 몰라요. 나와의 인연이 우주의 인연처럼 길다면 바람의 몸짓으로 불현듯 다가오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가슴 속의 숨처럼.
'처음
당신은
눈부신 흙이었을 터
하늘과 구름과 달과
별 바라
푸른 꿈 키웠을 터
.....
풍화에 금 가고
색 바래
뒤뜰 구석진 자리'
- <옹기> 중에서
한 무더기의 흙이 장인의 손길을 통해 옹기로 태어난다는 것은 유일한 존재로서의 지위를 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흙으로 인간을 빚는 신의 입장과도 다르지 않다. 옹기이든 육신이든 생명없어 보이던 존재들이 뭉쳐짐으로써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허 시인의 시선은 생물과 무생물을 차별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애정을 드러낸다. 이는 첫 시집인 <그리움의 총량>에서 익히 드러난 것들의 확인이자 확장이다.
'사랑은 그대를 입고 나를
사는 일인데
나는 그대를 입지 못하여
나를 살지 못하네
사랑하는 이여'
- <사랑은 그대를 입고> 중에서
이 시를 멋진 작곡가가 노랫말로 쓴다면 많은 이들의 애청가요가 될 것만 같다. 이 시가 지닌 대중성 뿐만 아니라 보편성과 직관성으로 인해 긴 시간 사랑받는 명곡처럼.
허향숙 시인은 두번째 시집인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를 통해 시인으로서 긴 생명력을 보여줄 것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는 허 시인의 특장점인 관찰성과 관념성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관찰을 위한 관찰은 중심을 벗어나 떠돌기 쉽고 관념을 위한 관념은 골방에 갇혀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할진대, 관찰이 관념을 위해 보조하고 관념이 관찰의 중심을 잡음으로써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이 조화의 의식은 진화를 거듭할 수록 이 시집의 제목이 주는 표현처럼 오랜 미래에서도 허 시인의 작품을 기대케 한다.
첫 시집인 <그리움의 총량>의 인기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준 두번째 시집인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를 통해 더 넓어지고 깊어진 허향숙 시인의 세계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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