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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율리시즈
  • 비대칭 인간
  • 이은정
  • 15,300원 (10%850)
  • 2023-11-10
  • : 390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땅속으로 가만히 숨고 싶어진다. 알고 보면 시기만 다를 뿐 모두 비슷한 패턴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본인도 다를 바 없는데 타인에 대해서만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일관하기에 우린 그토록 오만한 것이 된다. 자신은 거의 모든 삶의 피해자이고 타인은 대체로 삶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 속에서 우린 그토록 이기적인 것이 된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오만하게 혼자가 되는 늙음, 나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 p.186, '소란'의 일부, 이은정 소설집 <비대칭 인간> 중에서 (도서출판 득수)

외눈박이만 사는 마을에 양눈을 지닌 존재가 홀로 가면 필시 돌연변이나 비정상으로 취급되어 왕따나 홀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의 정상과 비정상은 주류에 속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구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은정 작가의 새로운 소설집인 <비대칭 인간>은 의미심장하게도 책을 거꾸로 세워서 제목을 보면 <인간 비대칭>으로 읽힌다. 얼굴의 좌우가 다르게 보이거나 움직임이 따로일 때의 표현을 비대칭 인간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때의 존재는 전체 속의 일부이자 대중과는 다른 존재의 표현이다. 그러나 비대칭 인간의 경우는 우리 모두는 똑같지 않고 다 다른 존재라는 표현에 가깝다. 비대칭 인간은 일반 속에서 특수를 특정해서 추출하는 경우라면 인간 비대칭은 우리 모두 각자가 특수한 존재라는 표현에 가깝다. 그렇기에 '비대칭 인간의 사회'는 주류 속에서 소외가 배태될 가능성이 높고 '인간 비대칭의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있는 곳에 가까울 것이다. 이은정 작가의 새 소설집은 비대칭 인간의 시선을 넘어서 인간 비대칭의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자는 문학적 제안으로 읽힌다.

젊은이들의 우연처럼 보이는 사고를 '눈'으로 복수하는 <눈이 와요>, 젊은 연인들의 아슬아슬한 결별과 화해를 다룬 <침대는 잘못이 없었다>, 정작 주위는 관심없어 보이는데 스스로가 얼굴의 왼쪽 오른쪽이 다르다고 고민하는 <비대칭 인간>, 배경과 스펙이 좋은 허위가족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진짜 가족을 이루려는 <유령 가족>, 갑을관계나 다름없는 건물주 틈에서 다뤄지는 세입자의 생존기인 <입금하는 사람>, 긴 기간동안 인간관계의 오해와 비난이 덧대워진 것을 한참 후에 다시 풀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소란>, 여러 희생을 감수하며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엄마의 행복의 자리는 어디인지 살펴보는 <엄마 같은 말> 등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은 말 그대로 지금 여기 한국사회의 어떤 한 모습일 것이다. 바로 옆집 혹은 이웃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은 이 이야기들은 적지 않은 울림과 감동을 준다.

모든 작가들이 그러한 경향을 지닌 건 아니지만 이은정 작가는 작품의 세월을 통해 성장의 진화를 엿볼 수 있는 부류일 것이다. 이은정 작가의 첫번째 소설집인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이 소재의 치열함을 통해 인간군상의 희비극을 다뤘다면 이번 작품들은 좀 더 일상적이면서도 삶과 사회를 이루는 질문들을 다룬다. 삶의 일상을 주로 다루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문학적 버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보자면 이은정 작품을 작품답게 하는 지점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혹은 정상적으로 보이는 평범한 삶의 끝에서 경계 밖으로 추락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의 묘사에 있다.

이 작가가 보기에 젊은이들은, 특히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은 위태롭다. 실은 여러 젊은이들중에서 평범하고 안온하고 부유한 젊은이들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기 위해 분투하는 젊은이들을 작품으로 호출한다. 이때의 젊음은 영혼의 젊음과도 다르지 않다. 육신만 이제 막 어른이 됬기에 삶과 사회를 지혜로운 원로처럼 대처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저 영악하게 살만큼 이기적이지도 않다.

살기 위해서든 깨닫기 위해서든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젊음은 멀리서 바라보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얼마나 치열한가. 이 치열함과 복잡다단함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먹는 것이 해결된 상태에서의 고고한 명상도 아니고 '체험 삶의 현장'에서 모든 것을 거는 외줄타기와도 같은 아슬아슬함 속에서 조금씩 깨닫는 무엇과도 같다. '삶이 곧 수행'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 수행이란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과 그냥 사는 것은 적지 않은 결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삶의 현장 한 가운데에 있다 보면 '감정의 관찰자'가 되기 보다는 '감정의 주인공'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혹은 연극을 비롯한 여러 예술은 우리 각자가 인생이라는 무대위의 배우로 와서 잠깐 살다가는 존재라는 것을 환기시켜주는 훌륭한 장치이다. 삶의 주인공 보다는 삶의 관찰자로 살 때를 깜빡 하고 있을때 이은정 작가를 통해 문학은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이은정 작가는 작품에 따라 여러 성격과 주제가 드러나지만 지금 여기 한국사회의 지점을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아주 옛날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쁜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소재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미학이 선악을 넘고 미추를 넘어 삶의 총체성을 통해 나타나는 경험과 깨달음이라고 볼때 실존의 진정성은 진가를 드러낸다.

자연은 많은 소리를 들려준다. 동물소리, 물소리뿐만 아니라 식물조차도 소리를 들려준다. 도시도 많은 소리를 들려준다. 인간의 소리, 문명의 소리가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들린다. 귀와 눈이 열린 존재는 그것이 열린 만큼 이 총체속에서 배우고 나아갈 것이다. 작가와 예술가는 더 나아가서 여기에서 영감을 받고 작품을 통해 새로운 총체를 구축한다. 자신이 경험한 즐거움 뿐만이 아니라 처절했던 순간의 경험조차도 그것을 버리지 않고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이때 치열한 삶의 무대로 걸어가는 작가 혹은 예술가의 선택은 잠재의식적인 영혼의 선택에 가깝다. 육신을 지닌 고단한 존재는 치열한 삶의 무대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선험적으로 차단하고 봉인된 의식으로 선택한다. 육신의 부유함과 안온함이 아니라 생존조차도 위협받는 치열한 삶의 무대를 선택한 영혼은 용기있고 성숙한 영혼이다. 섭리는 삶의 과제를 해결할 만한 존재에게 큰 과제를 주는 법이다. 위대한 작가와 예술가는 기꺼이 이 벅찬 과제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기어이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이은정 작가처럼 실존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문학의 기획이 기어코 삶의 고단함을 넘어서길 바란다. 먼 훗날 피안에서 회고할 때, 평온했으므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치열했으므로 행복했노라고 얘기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는 지상에서의 상업적 성공이 어느 정도였는가와는 별개로 엄청나게 진화한 예술적 영혼이 누릴 수 있는 훈장과도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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