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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세한 체조
- 요시타케 신스케
- 18,000원 (10%↓
1,000) - 2023-08-25
: 2,240
[어른이 아이의 상상력으로 살아남아 간다는 것]
- 요시타케 신스케의 <섬세한 체조 (도서출판 마르코폴로, 2023)> 후기.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이다. 문제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서도 예술가로 남아 있는가이다."
- 파블로 피카소
이 구절을 그림책 작가로 유명한 요시타케 신스케에게 대입해 본다면 어떨까요? 이미 그는 중년을 훌쩍 넘었지만 절반 이상의 마음은 여전히 어린이로 남아 있는듯 합니다. 순수함, 상상력, 자기다움, 소박함 등등이 어른이 되었다고 없어지거나 퇴화(?)되지 않은 채 생생히 살아 돌아옵니다. 그림책으로 말이지요.
이미 숱한 그림책으로 알려져 있고 <이게 정말 ~일까> 시리즈로도 잘 알려진 요시타케의 신스케의 새로운 번역 신간인 <섬세한 체조>, 부제로는 '예민보스의 마음 재활훈련'인 이 책을 감상하다 보면 이전 책들인 정교함, 정갈함과는 다른 다양한 마음의 높낮이가 다른 채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일상적이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것들부터 크고 작은 사건들의 파장으로부터 비롯된 순간들을 기발한 상상력이 더해진 채 하나의 그림으로 딱 나타납니다. 이건 마치 사진작가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찰나의 순간인 작품들을 그림 버전으로 바뀐 채 상상력이 더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러티브나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채 그림의 나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속시원하게 설명되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웃음과 일상과 상상력이 버무려진 채 '생활의 발견'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강한 것, 뚜렷한 것, 확실한 것만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너무 사소해서 시시해 보이는 것, 그러나 시시하지 않고 매일 루틴처럼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들이 얼마나 숱하게 많은 지, 그것들이 있어서 결국 소중한 것, 강렬한 것들이 주목받을 수 있도록 삶의 토대를 구성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작은 지혜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 세계를 구성함에 있어 우리 눈에는 잘 띄지도 않는 숱한 미생물들이 생태계의 한 기반을 구성하듯이 시시해 보이지만 시시하지 않은 일상, 소소해 보이지만 소소하지 않은 일상의 연속은 작은 행복을 예비합니다. 이런 특성은 요시타케 신스케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일본문화의 한 특성을 이루기도 합니다. 지루할 정도로 잔잔해 보이는 일본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의 와중에서 드러나는 작은 사건, 행복, 상상은 작은 웃음과 감동을 주기도 하니까요.
센 것, 매운 것을 많이 좋아하는 한국문화와 대비해서 그들의 시선에서 우리가 혹 너무 시시하거나 잔잔해 보여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둘러볼 기회마저 줍니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일본이라는 국가와 사회문화는 황혼에 접어들었거나 쇠락의 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체제나 건강한 시민의식이라는 지평으로 볼 때 이미 여러 한계를 노출하고 있고 그 상황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일본문화의 정점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절정기와 거의 일치했던 것 같습니다. 한때 만화의 최대강국이었던 시절에서 이젠 디지털 만화인 웹툰의 시기를 한국이 넘겨 받으면서 일본문화는 과거로 기록되고 문화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체적 기세나 규모로는 이제 힘을 쓰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국가적 융성이나 쇠락에 상관없이 뛰어난 예술가나 작가는 늘 나옵니다. 일본사회의 그늘을 늘 따뜻한 시선으로 성찰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그런 경우일 겁니다.
요시타케 신스케는 일본문화의 한 원형처럼 보이기도 하는 소박함과 소소함에서 출발하여 어린이의 상상력을 잃지 않은 채 삶의 일상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는 매력을 지닌 그림작가입니다. 국가에 대한 반감이나 호불호와는 별개로 이런 선한 가치를 지닌 이들의 공감과 연대가 더 좋은 공동체를 이루는 바탕에 일조할 겁니다. 그곳이 한국이든 일본이든 말이지요.
신스케가 무명시절에 지었던 데뷔작인 <섬세한 체조>가 출판사들의 인정도 채 받기도 전에 자비출판으로 나온 후, 이제서야 한국에서 번역판으로 나온 것은 한참 늦은 시기이지만 신스케 팬들에게는 물론이고 그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지 디자인과 그림들로 인해 새로운 팬들이 생길 것 같습니다. 또한 그림과 함께 짧게 들어간 글과 경구, 문장들을 우리의 감각에 맞게 재구성한 서지은 작가의 반짝이는 번역이 인기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 같고요.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는 뛰어난 학자 이전에 건실한 심신수행자였습니다. 도학으로도 불리우는 수행에 있어서 그들은 매일의 루틴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현대인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됩니다. 요가든 명상이든 필라테스이든 삶의 수행으로서의 일부를 이루는 이들은 자신의 중심을 잡고 언젠가는 그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요시타케 신스케는 매일의 그림 스케치라는 수행을 통해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 재미와 상상, 삶의 일상이 주는 행복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겁니다.
모더니즘 문학의 한 기둥을 이루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초판 출판을 자비로 시작해서 매우 천천히 스스로를 알려갔듯이 요시타케 신스케가 사무실 여직원의 작은 한마디의 칭찬에, 꾸준한 그림작업을 통해 명성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를 구성해 갔듯이, 그가 언급했던 대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셈이니 길게 보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크든 작든 타인의 장점을 잘 봐주고 칭찬해 주고 공감해 주면서 말이지요. 행복의 공동체는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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