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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니, 너 없는 동안
- 이은정
- 13,500원 (10%↓
750) - 2023-03-25
: 365
[기도와 바램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움직인다]
- 이은정 작가의 <지니 – 너 없는 동안> 후기.
‘떠나기 싫은데 떠나야 하는 사람과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불행할까.
동안은 자신이 저울질하는 것들이 행복이 아니라 불행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에 힘이 빠졌다. 베틀에 얽매인 피륙처럼 올곧게, 끊임없이 차오르는 감정, 그게 분노인지 슬픔인지 동안은 확신할 수 없었고, 자신의 감정을 확신할 수 없다는 건 조금 부끄러웠다. 동안은 불결하고 잡스러운 생각들에 시달려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 이은정 소설 <지니 – 너 없는 동안> (도서출판 이정서재, 2023) p.19 중에서.
청소년기의 삶은 어쩌면 직관(감성)과 논리(이성)의 삶 중에 어떤 방식을 중심으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시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방법론적으로는 마치 대학에 가기 위해 문과와 이과 중에서 선택하는 것 처럼요. 어릴 적의 삶은 대체적으로 순수하고 직관적입니다. 나이에 따라 다르지만 이는 커가면서 경험과 계산이 축적되어 이성화되어 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이성적으로 산다는 것, 계산적으로 산다는 것, 논리적으로 산다는 것과 대비하여 직관적으로 산다는 것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 감에도 직관과 감성을 잃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지닌 내재적인 성향이나 취향과는 별개로 여전히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여러 종합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자기다움, 창조성, 삶의 열정적인 방향성은 결국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일 겁니다.
이은정 작가의 장편소설 <지니 – 너 없는 동안>은 에세이와 병행해 온 작가의 두 번째 소설작품입니다. ‘동안’이라는 청소년이 요술 주전자의 지니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가족과 학교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옛날 이야기의 ‘알라딘’이 ‘동안’이라는 주인공으로 바뀌고 지니는 천년동안 요술 주전자에 갇혀 있다가 다시 나타납니다. 원하는 소원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지만 단, 조건이 있습니다. 특정한 존재에게 불행을 기원하는 형태로 말이지요. 이 점이 어린 동안에게 여러 복합적인 마음과 경험을 불러 일으킵니다. 가장 예민한 시기의 동안이에게 지니의 등장은 그의 삶을 극적으로 더 도약시킬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지니가 없어도 충분히 극적인 사춘기 드라마의 삶에 말이지요.
삶을 살다보면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상응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행복과 불행의 시기를 달리 해서 주기적으로 돌고 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행복했던 일이 지나고 보면 불행으로 변하기도 하고 이보다 더 힘들거나 불행할 수 있을까 하는 순간도 지나고 보면 더 큰 도약을 위한 바닥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은정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불행처럼 보이는 사건 속에서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 행복으로 바꿔보는 시선을 유도합니다.
한국인들은 종특적으로(!) 기도와 바램을 즐겨하는 민족입니다. 정한수 한그릇을 떠놓고 무탈함과 행복을 비는 소복 여인의 모습은 현대에도 변환이 되어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런 기도와 바램은 장시간을 통하여 서서히 결과를 드러냅니다. 순간과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바램과 염원의 한 조각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지니에게 소원을 비는 형태는 단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일지 몰라도 결국은 우리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속에 요술 주전자가 있고 그 속에는 소원을 들어줄 지니가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진심을 담은 소원을 비는 내 마음이 존재한다면 말이지요.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기도와 바램의 정성이 주는 잠재력을 인지한 이들에겐 매일매일 작은 기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작은 기적들의 결과가 개인의 이기심으로만 충당될 지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으로 전이될지는 또다른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은정 작가는 <지니 – 너 없는 동안>을 통해서 직관력이 완전히 닫히기 전의, 말하자면 완전한 어른(?)이 되기 전의 아이들이 가지는 순수한 영향력을 통해서 절대반지의 위력이 주는 결과가 어떻게 빛처럼 보이는지 혹은 그늘처럼 보이는 지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육신은 이미 어른이 되어 가면서도 마음으로는 어린아이보다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성숙한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한 육신의 삶을 가뿐히 넘어가는 매우매우 긴 시간의 시행착오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서도 직관을 잃지 않는 중심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어른을 위한 동화이기도 하면서 청소년 시기를 슬기롭게 보내고 싶은 이들을 위한 작품입니다. 마지막까지 재미와 성찰을 던져줍니다. 흔한 장르소설에서는 재미를, 엄숙한 문학에서는 가치와 교훈을 배울 수 있을 테지만 이 작품은 이 양자 사이에서 매력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은정 작가의 내공이 깊은 문장과 스타일의 문학적 기본이 베이스로 중심을 잘 잡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백세시대의 삶에서 희노애락은 쉴새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행복과 불행은 바이오리듬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며 움직입니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감정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을 갖출 수 있다면 더 멋진 일일 겁니다. 삶과 수행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이들에겐 자기 객관화의 정도에 따라 의식의 수준이 더 상회하고 있다는 지표로 볼 수 있습니다. 문학에서의 전지적 시점은 그 서술양식의 정도에 따라 더 나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지표로 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문학의 길이란 통찰의 시선이 전지적 시점의 그릇으로 넓혀지는 길이고 이는 더욱더 우주적 시선으로 향해 가는 삶의 수행과도 결국 통하는 길일 겁니다.
이 작품의 4장 제목처럼 ‘인류의 평화를 위한 여정’이 어른들이 보기엔 아이들 장난같이 보일지라도 그 진심어린 마음들이 모인 의식과 실천은 하늘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늘이 보기에 뛰어난 의식은 나이가 어리냐 많냐가 아니라 이 작품의 등장인물인 ‘고은’의 말처럼 진심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진심이 통한다면 논리적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 크고 작은 기적이 언제든 일어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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