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하여
율리시즈 2023/01/0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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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멸의 즐거움
- 김명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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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 2022-11-21
: 143
'세상에 남루만큼 따뜻한 이웃 다시 없어라
몰골이 말이 아닌 두 탑신이
낮이나 밤이나 대종천 물소리에 귀를 씻는데'
- 김명리 시집 <적멸의 즐거움> 중에서 (2022, 문학동네 시인선 포에지)
김명리 시인이 시집 <적멸의 즐거움>을 통해 주로 다루는 대상들은 사라져 가는 것들, 소멸해 가는 것들이다. 삶으로 치자면 생로병사의 '사(死)'이자 흥망성쇠의 '쇠(衰)'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김 시인의 시선으로 보는 소실되어 가는 모든 것들은 고적하다. 쓸쓸하다. 애잔하다.
흥미롭게도 김 시인이 바라보는 소실되어 가는 것들은 대부분 삶과 죽음의 명확한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다. 폐사지의 사찰로서의 기능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폐가조차 바로 철거되지 않는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조차도 바로 베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듯 죽어있는 듯 서서히 사라져 간다. 이로 인해 모든 대상들은 자연과 다른 대상들과 대비해 명확한 객체성을 유지하지 않는다. 폐사지에서 어느 곳이 절이고 어느 곳이 터이고 어느 곳이 땅인가. 명확한 구획과 분리가 의미없다. 그저 자연의 일부로 쓸쓸하지만 서서히 스며들어 갈 뿐이다. 허물어져 가는 오래된 탑들조차도 바람과 새들과 더불어 우주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너와 나와의 경계가 무의미하고 삶과 죽음의 명확한 시간이 덧없다.
김 시인이 바라보는 죽음과 쇠락은 한 순간의 결정이나 순간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과정일 뿐이다. 그리하여 생명 탄생의 순간이나 약동하는 봄의 활력이 주는 에너지의 반대급부로서 쇠락과 소멸의 슬픔과 쓸쓸함을 던져주는 듯 하다. 그러나 육신의 끝이 비극처럼 보일지라도 영혼의 입장에서는 또다른 삶의 단계로 가기 위한 과정이듯이 자연과 그 곳에 녹아든 소실되어 가는 대상들은 새로운 계절을 맞기 위한 갈무리를 보여준다.
끝은 끝이 아니다. 육신의 끝이 영혼의 끝이 아니듯이. 낙엽의 끝이 나무의 끝이 아니듯이. 나무의 끝이 자연의 끝이 아니듯이. 자연의 끝이 우주의 끝이 아니듯이. 그저 인간에게는 한 인간의 삶의 주기가 있고, 나무에게는 한 나무의 주기가 있고, 지구조차 한 행성의 주기가 있을 뿐이다. 특정한 대상의 한 끝은 새로운 주기를 위한 소멸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준비의 과정이기도 하다. 거지로 태어났다 삶을 마감하기도 하고 부자로 태어나도 삶을 마감하는 때가 있고 절대권력의 왕으로 태어나도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이 모든 경험이 한 영혼에게서 일어나는 주기의 과정일 뿐이다.
김 시인은 삶과 자연의 찬란한 때, 절정의 시기를 주목하지 않고 그들의 전성기가 한참 지난, 쇠락하여 사라져 가는 주기의 소실점을 주목한다.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고 외면하고 싶어하는 소멸의 시간과 공간을 주목함으로써 역설적으로는 자연과 세계가 들려주는 위대한 섭리의 가치를 드러내어 준다. 이 가치는 고고학적인 단어와 문장을 건져냄으로써, 기꺼이 삶과 세계와 자연이 어우러져, 결여처럼 보이는 기나긴 소멸의 과정을 슬프도록 처연하게 들려줌으로써 언어의 사제라는 지위를 자연으로부터 서품받는다.
재물의 부자를 체험한 영혼은 마음의 부자를 체험하고 싶어한다. 마음의 부자를 체험한 영혼은 마음조차 비우고 싶어한다. 완전한 비움의 그 때가 우주의 의식과 연동이 되거나 하나가 되는 순간일 것이다. 어쩌면 억겁의 시간이 걸릴 지라도 다가올 그 순간은 물질적으로는 적멸의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열반의 시간이다. 육신적, 물질적으로는 이 과정이 괴로움을 수반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즐거움을 수반한다. 이 과정을 선천적으로 받아들인 영혼은 봉인된 시간으로 인해, 육신과 함께 하는 것으로 인해 희노애락의 감정을 드러낼 수 밖에 없으나 상위의 의식은 사랑의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수백년이 걸리든 수만년이 걸리든 불과 한 방울로 시작된 우리 모두의 영혼은 이 여정 위에 과정으로 존재한다. 육신으로서 가진 것이 많은 존재는 이승을 떠날 때 가져갈 것이 빈약하다. 영혼으로서 가진 것이 많은 존재는 설령 육신을 굶겼을 지라도 저승으로 가져갈 것이 많다. 그것은 영혼의 진화라는 선물이다.
육신이 고될 수록 영혼은 한층 진일보한다. 물질적인 결여가 육신에겐 고통일 수 있어도 영혼에겐 베일에 가려지지 않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정신의 풍요를 준다. 육신은 짧고 영혼은 길다.
김 시인은 마음의 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이 땅에 바짝 엎드려 대지가 들려주는 수만가지의 소리를 듣는다. 폐사지의 서서히 소멸해 가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듣는다. 그리고는 독자들에게 생소하지만 숨어 있던 고귀한 단어와 문장으로 고고학의 시어를 들려준다. 한번 파서는 알 수 없고 파고 또 파야 서서히 드러나는 고대 유물의 실체처럼 감상하고 또 감상하며 되새김질하며 잠자던 영혼의 원류를 일깨우는 것처럼.
현대인의 삶은 도시의 삶, 일상의 삶, 육신의 삶으로 거칠게나마 요약될 수 있다. 김 시인은 이런 현대인의 쳇바퀴의 잔잔한 삶에 노크를 한다. 도시보다는 자연을 조금 더 바라보자고, 일상의 삶에서 시를 통해 주목하지 않았던 존재들에 대해, 육신의 삶에서 가장 끝처럼 보이는, 소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을 바라봄으로써 우리 영혼을 거울처럼 되돌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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