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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율리시즈
  • 한국영화 세 감독, 이창동·홍상수·봉준호
  • 임우기
  • 14,400원 (10%800)
  • 2021-05-14
  • : 281
대 샤먼(Great Shaman)은 어떻게 밝혀지는가.
- 임우기 평론가의 <한국영화 세 감독 -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 비평.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시점인, 21세기를 넘기기도 전인 1996년에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가 내한해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현대사회에서 철학의 역할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었다. 그 당시 프레스센터엔 하버마스뿐만 아니라 김우창, 이명현, 김광수 교수 등을 비롯한 한국지성들이 같이 모여 이 멋진 주제에 대한 질문과 토론을 이어갔다. 당시 나는 하버마스의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과 의사소통과 공론장에 대한 하버마스의 책과 글들이 주요 관심이기도 해서 일과로 바쁜 몸을 이끌고 참석했었다. 현대성(Modernity 혹은 근대성)이란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행과 맞물려 폐기해야 할 근대의 산물인지 여전히 질서를 위한 최소한의 개념인지에 대한 성찰에 많은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또한 지금에서도 여전히 한국에서 자리잡고 있지 못한 의사소통을 위한 사회적 공론장의 토대가 어떻게 가능한 지를 놓고서도 사색의 중점을 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프레스센터에서 하버마스의 여러 이야기 가운데 가장 폐부를 찌른 것 중의 하나는 한국은 아시아의 긴 전통 속에서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적이고 철학적 소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지성들이 이를 영감으로 하거나 바탕으로 삼은 지성적 성과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우회적 비판을 한 기억이 난다. 이미 구한말에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이 등장했음에도 우리는 서구 물질문명의 모든 장점과 단점을 온전히 겪고난 21세기가 되어서야 아시아를 비롯한 한국 정신문명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것일까.

출판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임우기 선생의 영화평론집 <한국 영화 세 감독,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는 내가 인지하는 한 동학을 중심으로 혹은 한국사상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영화평론을 전개한 독보적이고 선구적인 저작이다. 이 사실은 임 평론가가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를 통해서 이미 문학에서 고유의 평론을 전개하였지만 영화의 영역으로 그 관심사를 넓힘으로써 사상적으로나 장르적으로도 한국사상을 기초로 한 비평이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영향력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제대로 확인시켜 준다.

임 평론가가 전개하는 영화평론은 ‘유역문예론’에 바탕한 작품비평이다. 이는 책의 후반에 설명되어 있기도 하지만 유역문예론은 나의 이해 선에서 요약하자면 전 세계의 각 지역에서 배태된 고유문화를 이해하고 그 존재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피며 연대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민족이나 국가라는 거대한 영역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며 각 개인의 특성보다는 더 넓은 영역의 가치를 지닌다. 다른 의미로는 지역적 공동체의 문화적 특성을 각기의 점(點)으로 하고 이 각각의 점들을 이어가는 선(線)에 의해 이루어 가는 포괄적 공동체 문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과 선들이 모이면 아름다운 유역문화의 면(面)이 구성된다. 임 평론가가 유역문예론에 대한 자신감과 이를 바탕으로 전개하는 그 근거는 당연히 동학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구체적으로는 한국사상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동양적 가치 때문일 것이다. 주역의 음양오행(陰陽五行),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향아설위(向我設位) 등등의 사상적 바탕이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이는 평론으로도 이어진다. 물론 이런 전개는 많은 작가들에게 작품을 통해서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이 섞여서 나타난다. 다만 임 평론가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끄집어 내어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한다. 바로 이 부분이 가장 빛나는 성과의 하나일 것이다.

임 평론가의 사상비평적 바탕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제대로 진단할 작가 중의 한명은 단연코 이창동 감독일 것이다. 이는 문학가 출신으로서의 이창동 감독이 보여주는 고도의 상징과 비유가 영화적으로, 어쩌면 문학에 있었을 때보다 영화계로 갔을 때 이 감독의 진가가 더 제대로 발휘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문학적 상징의 비유가 단순히 장르적 이전에 머물지 않고 동양적 미학을 매우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창동 영화의 재발견, 임 평론가의 영화적 해석의 독보성이 드러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픽션과 논픽션, 드러남과 은폐됨, 진실과 거짓말이 혼재되어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것의 사실성 여부의 너머로 삶의 진성성과 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문제적 걸작이다. 이 감독은 명작 <밀양>을 통해서도 칸 영화제에서도 인정받기 했지만 <버닝>은 대단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는 일부애호가들만 인지할 뿐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미지의 안개와도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임 평론가는 <버닝>의 숨겨진 매력들을 유역문예론에 입각해 하나하나씩 풀어낸다. 임 평론가가 보기에 이 영화의 매력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과 음(陰)으로 상징되는 그늘 혹은 여백의 의미와 카메라가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이 의식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세계의 통찰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는 <버닝>, <밀양>, <시>를 통해 ‘보이지 않는 자연’을 보여준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p.19). 이는 다시 말하자면 노자의 무위자연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이청준 원작의 <벌레 이야기>를 가져왔는데 걸출한 연기자인 전도연과 송강호를 통해 군림하는 신,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신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응시하는 주체적인 선택으로서의 신의 문제를 영화적으로 승화시킨다. 이런 경우에 인간의 삶의 환경은 피동적인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환경을 이루어 간다는 점에서 신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신과 함께 하는 삶으로서의 세계가 드러난다. <밀양>의 후반부에서 신애가 머리카락을 자르는데 영혼의 일부인 머리카락들은 흩날리고 햇볕(陽)은 그늘(陰) 곁에 흐르는 도랑물 위에서 반짝인다(p.83).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영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 없다고 보는 애니미즘적인 시선에서 본다면 하찮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사소한 행동은 아무 것도 없다.

이창동 감독의 <시>의 후반에서 미자가 쓴 첫 시를 낭송하는 장면에서 희진으로 빙의되는 장면은 희진의 자살장면의 직전이 아니라 근원적 자연과 영매의 활동으로써 이 감독의 숨은 스토리텔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p.95). 미자의 존재를 통해 시인은 영매가 된다. 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연신을 불러내는 샤먼의 역할을 한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영혼을 들여다보기를 의식적으로, 무의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사제와 예술가는 그 역할이 다르지 않다.

영화를 조금 깊이 들여다보는 애호가들은 홍상수 감독이 에릭 로메르 감독의 적자거나 큰 영향권 안에 있음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은 한국에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삶과 일상을 허위의식과 솔직함의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홍상수표 세계관을 독자적으로 일구고 있다. 임우기 평론가가 120쪽에서 무려 25여쪽에 걸쳐 전개하는 <북촌방향>의 비평은 욕망과 이성, 우연과 필연, 역할의 이중성과 바꿈, 드러남과 은폐, 자연의 질서에 흘러가는 인간존재의 문제와 연계된 홍 감독의 작품관을 유감없는 비평의 역량으로 제대로 보여준다. 동양적 시선 혹은 유역문예론의 시선이 아니면 안개 속으로 감추어졌을 내용들이 수면 위로 나타난 것과 다르지 않다. 홍 감독의 작품관은 스스로의 역량과 한계에 대한 솔직함을 일상성이라는 장치로 보여주는 방식이며 이는 스스로의 반성과 함께 스스로 진화하려는 홍 감독의 인격과 작품이 별개가 아닌 셈이다. 홍 감독의 삶과 작품에 호불호가 있음에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반성하는 시도를 작품을 통해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모든 분야에서 지덕체를 갖춘 완전체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장점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방편의 하나로 삼기도 하고 이를 통해 모자란 부분을 포기할지(?) 보완할지 고민하기도 하지만 이는 최고부자부터 최고빈자까지 누구나 지니는 자신만의 숙제같은 것이다.

세 감독의 비평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대한 에세이는 서두에서 언급하듯이 본격적인 영화비평과는 조금 다르다. 다만 임 평론가는 <기생충>에 대한 기존의 평론들이 계급론에 치우친 면이 있어 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지상, 반지하, 지하에서 이루어지는 삶들이 계급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이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임 평론가는 지하 깊은 곳에 은거하는 ‘근세’라는 인물을 주목한다. 실제로는 귀신이 아님에도 지상의 아이에겐 귀신처럼 목격되어 ‘그림’으로 남은 이 존재는 우리가 잊고 싶어하지만 사라질 수 없는, 그러나 이 세계의 숙제와도 같은 그런 존재이다. 이 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종종 나타나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어쩌면 우리가 근세와 같은 존재가 되어 지하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임 평론가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 <살인의 추억>, <기생충>을 통해 ‘귀신론’을 설파한다. <마더>에서 김혜자가 처음 장면에서 혼자 춤추는 장면과 후반의 버스에서 같이 춤추는 장면은 무(巫)의식의 접신과 떼어놓고 설명하기 힘들다.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두만은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 태윤 앞에서는 과학수사를 해야지 하면서도 수사가 미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점집을 찾기도 한다. <괴물>에서 괴물의 입으로 들어갔는지 잡혀갔는지 모를 실종된 현서가 가족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나타나 같이 식사를 한다. <기생충>에서는 부자와 빈자의 대립이라는 표면적 스토리를 넘어 시각,청각,후각,촉각 등을 통해 은폐된 내러티브가 마침내 드러난다. 이는 귀신처럼 작용하는 근세의 역할을 통해 예술의 생생함을 보장한다(p.223). 이에 의하면 봉준호 감독은 귀신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혹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가장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감독 중의 한 사람이다.

임우기 평론가는 영화비평에 대한 이력이 길지 않고 세 감독을 중심으로 한 몇몇 작품에 대해서 비평을 남겼지만 이 비평은 독보적이고 선구적이어서 모든 영화감독들이 이 책을 읽고 용기와 자극을 얻기를 바란다. 또한 영화애호가들이 이 책을 통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을 얻기를 바란다. 이 시선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것이어서 영화와의 대화를 위한 매개체로서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사상에 애정이 깊고 수행의 방편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프레임으로만 영화를 보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비평적 시선의 관점을 넓힐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얼마 전에 이창동, 김태용, 이명세, 나홍진,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등을 한국을 대표하는 7인 감독으로 꼽은 바 있다. 현재의 활약상이나 여러 면으로 볼 때 박찬욱 감독과 나홍진 감독에 대해서도 임우기 평론가가 이야기해줄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예를 들면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서구의 <엑소시스트>와 같은 영화의 주제와 통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역작이자 유역문예론에 잘 어울리는 작품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해마다 나오는 영화편수만큼 모든 영화가 작품(!)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적지 않은 영화들은 상업성과 대중성의 한계에 갇혀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명작도 종종 이해받지 못하거나 오해를 받아서 사라진다. 안개에 가려진 명작들을 다시 해석하고 길러내는 평론가의 역할은 숨어있던 본성과 영혼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샤먼의 역할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부록해설로 실린 유역문예론 등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내 소감을 말하자면, 솔직히 이에 관한 것만으로도 책 한권을 별도로 쓰고 싶은 분량의 이야기이다. 다만 이에 대한 나의 소감을 간략히나마 얘기하고 나머지는 임 평론가의 이전 저작인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 등을 비롯한 후일의 소감을 남길 때마다 언급하고 싶다.

아시아의 사상은 유학을 비롯한 현실적인 가치를 담는 부분과 노자, 장자를 비롯한 도교로서의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에 네팔, 인도를 통해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가 아시아의 사상적 배경에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사상은 유학사상, 도교사상, 불교와 함께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비롯된 하늘사상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운 최치원이 한국의 사상을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라고 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며 현실적이며 탁월한 표현이라고 본다. 유불선이 골고루, 그리고 시대를 달리하며 주도적으로 혹은 배경으로 하며 끊이지 않고 한민족의 세월과 함께 해 온 것은 우리 민족의 마음그릇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원효의 불교사상,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이기론 논쟁, 화담 서경덕, 혜강 최한기와 다산 정약용의 사상 등은 어떤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띠고 있던지간에 한국 사상의 넓은 그릇이 배경으로 작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민족의 가세가 급격히 기울고 쇠락하던 구한말 무렵에 나타난 수운 최제우,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은 한국 사상사에서 가장 신비롭고도 기적적인 사건에 해당한다. 이들의 등장이 기울어가던 조선을 다시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의 역할은 그 당시의 조선을 새로이 정립하고자 한 것 보다는 후일을 위한 사상과 가치의 개벽을 위한 선지자로서의 역할이 지대하다. 이 세 인물이 준비한 개벽시대는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으로의 전환을 위한 예비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 예비는 정신과 영성이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인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신문명의 본격적인 정립은 구한말 이후로 100년 후가 되든 200년 후가 되든 이들의 행적을 종교와 도그마의 외피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사상으로서의 배경과 핵심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이 본격적인 시작일 것이다. 이를테면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동경대전>은 한국사상을 제대로 알리고 촉발시키는 하나의 트리거인 셈이다.

또 하나 꼭 얘기하고 싶은 것은 샤먼의 성격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 등이 샤머니즘을 알려주었던 장점을 넘어서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샤먼의 보편적인 성격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와 샤먼은 다르지 않다. 모세는 선지자이지만 샤먼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수운은 샤먼이지만 선지자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샤먼 중에서도 대 샤먼(Great Shaman)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은 대 샤먼과도 같다. 성인은 위대하고 보편적인데 샤먼은 지역적이고 토속적이고 협소하다는 편견을 그 역사적 용례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최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우주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관장하는 영역이 더 클지, 최수운의 한울님이 관장하는 영역이 더 클지는 정신과 영혼의 핵심에서 다룰 문제일지는 모르나 그 역할은 다르지 않다. 주기도문에서 나오는 ‘뜻이 하늘에서 임한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문장은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의 주문의 격과 하등 다르지 않다. 대 샤먼이 받은 주문은 지구적이고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 샤먼의 토속적, 지역적 성격을 지구적으로 확장시킨다기 보다는 원래 지닌 대 샤먼의 뜻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원래부터 보편적이었음을 밝히는 것, 이는 땅에 묻혀서 조금만 드러난 가치의 얼굴을 더 제대로 발굴하여 온전한 전체 모습을 드러내는 화석탐구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신문명으로의 개벽시대는 이 밝힘의 정도에 따라 느려지기도, 빨라지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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