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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율리시즈
  • 블루 마운틴
  • 임채욱
  • 49,500원 (10%2,750)
  • 2021-03-28
  • : 55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오대산 초입의 소금강 입구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 바라본 소금강의 정경은 비와 안개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걸작 동양화의 한 폭과 다르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의 동양화에 대한 내 생각은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상상 속의 그림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 날의 소금강을 본 순간 내 편견을 접어야 했다. 이쁘지만 사실적인 서양화의 풍경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한 동양인이 이윽고 한국의 산수(山水)와 동양화의 아름다움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내겐 이런 편견도 있었다. 사진이란 풍경을 그저 잘 담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은 매체일 것이라고. 그러나 임채욱 작가의 사진집 <블루 마운틴>을 본 후로는 확실히 이런 편견을 접어야 했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한국의 검푸른 첩첩산중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진 산수화집이다. 이 책의 첫장을 보자마자 하서 김인후의 ‘산밖에 산이 있어 산이 다함이 없고(山外有山山不盡)’ 라는 구절이 저절로 연상되는 파노라마의 장관이 펼쳐진다. ‘블루 마운틴’ 하면 호주의 블루 마운틴과 커피로도 유명한 자메이카의 블루 마운틴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을 테지만 한국의 블루 마운틴은 시린 겨울 첩첩산중의 서사성을 보여준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독자성을 확보한다. 이 점이 더 알려질 수 있다면 순전히 임채욱 작가의 공일 것이고 한국의 블루 마운틴은 더운 지방의 두 블루 마운틴과는 다른 매력을 확실히 드러낼 것이다.

임 작가는 블루 마운틴을 위해 덕유산을 중심으로 하고 대둔산을 일부로 하여 산의 고지에서 빙 둘러봤을 때 충정도, 경상도, 전라도의 지리산 자락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한국의 블루 마운틴은 사시사철 언제든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바람 불지 않는 낮은 기온의 맑은 날씨에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 산을 등지고 해가 비추는 역광이나 측면에서만 가장 짙푸른 산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시간적 길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찰나의 미학이 연상되기도 한다. 언제 어느때든 볼 수 있는 순간이 아니라 그때만이 가능한 순간이 있다. 임 작가의 말처럼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시간과 공간의 산 정상에 서 있다면 한국의 블루 마운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 작가의 작품에서 느끼는 감흥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직접 산에 당도했을 때의 고유성과는 달리 임채욱 작가는 과감한 일반화를 시도한다. 그 결과가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아트제 출판사에서 나온 <블루 마운틴> 작품집이다. 너무나 흥미롭게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배경인 인왕산 자락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영감을 제공해 준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자리 잡았던 바로 옆 자하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경계로 넘어가는 작품이다.

첫째로 <블루 마운틴>은 사진에서 그림으로 넘어가려는 경계에 서 있다. 임 작가는 해상도가 가장 높다는 1억화소의 카메라를 들고 대상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징성을 포기하고 번져 스며가는 한지에 작품을 담아 전시회를 열었다. 세밀화를 그리는 환경에서 투박화로 돌아가는 이 역설은 나무보다는 숲을, 실제대상보다는 분위기로 접근하려는 작가의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사진과 영상의 출현으로 인해 기술적으로 양적으로 대량복제가 흔해진 시대에서 이들 매체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고귀하고 유일한 ‘아우라’가 희석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우려했고 이의 극복을 위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벤야민이 볼 때 작품의 전시적 가치는 당연한 것이나 제의적 가치까지 제시할 수 있다면 그 매체의 도구는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전시적 가치는 땅(대중들)을 향한 것이고 제의적 가치는 하늘(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 숭고한 대상)을 향한 것이다. 새벽의 심산유곡에서 들어주는 이가 없어도 대금을 부는 이는 자연이라는 청자와 자아의 본성이 귀담아 듣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사진같은 그림도 많고 그림같은 사진도 많다. 임 작가의 작품은 후자에 속하지만 양적인 부류에서 질적인 부류로 도약한 소수에 속할 것이다.

둘째로 <블루 마운틴>은 그의 작품이력으로 볼 때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넘어가는 경계에 서 있다. 그림으로 보자면 서양화법에서 동양화법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동양화과 출신인 데다 그의 이전 작품집인 <인수봉>과 <지리산 가는 길>에서도 경향이 드러나긴 했지만 <블루 마운틴>에서는 그가 보여주는 관념 산수화(!)의 세계를 여실히 감상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겸재 정선의 등장으로 기존의 관념 산수화에서 진경 산수화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바 있는데, 임채욱 작가는 오히려 가장 실사적인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관념 산수화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서양화같은 동양화, 동양화같은 서양화가 제법 많아진 세계에서 굳이 이런 구분이 의미있을까 싶지만 실사적인 풍경 사진을 넘어서 가치의 본질을 담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과 집념을 엿볼 수 있다.

셋째로 주목할 점은 <블루 마운틴>을 통해 풍경에서 서사의 경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서사는 자연의 서사성 뿐만이 아니라 역사의 서사성까지 포함한다. 좋은 사진은 인물이든, 도시의 풍경이든, 자연의 모습이든 그 자체로 멋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진을 그냥 모아둔다고 해서 항상 위대한 작품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임채욱 작가는 <지리산 가는 길>의 ‘부부송’ 작품의 변주들을 통해서 한 대상이 어떻게 다양하게 보여질 수 있는지를 멋지게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서 <블루 마운틴>의 임 작가는 한국의 청산이 마치 한국인의 심성처럼 얼마나 강인하면서 짙푸를 수 있는지를 장엄하게 웅변한다. 이 검푸르고도 짙푸른 서사는 날씨와 빛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변천의 이야기를 지닌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서사마저도 품고 있다. 환경의 산물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특히 한국인이라면 검푸른 첩첩산중의 모습에 자신의 심성이 깃들여져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강인함과 인내심의 모습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흘러들어간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말하자면 ‘한국 청산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는 이 변주를 위해 크게 세가지의 프레임으로 구성했는데 파노라마, 랜드스케이프, 포트레이트의 형태가 그것이다. 파노라마를 통해 임 작가는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장대하게 펼쳐지는 첩첩산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미국의 그랜드 캐넌이나 호주의 블루 마운틴과는 다른 성격의 스케일이자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고유성의 스케일이기도 하다. 랜드스케이프를 통해 임 작가는 우리 시선이 보여주는 가장 안정된 구도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이는 위압감을 내려놓은, 우리에게 더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모습의 청산이기도 할 것이다. 포트레이트는 세로의 직사각형 프레임으로서 첩첩산중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형태이기도 하다. 포트레이트의 몇몇 작품들에서 나는 정선의 <금강전도>가 떠올랐다. 첩첩산중의 세로 미학이 그대로 드러난 셈인데 하나는 그림이고 하나는 사진이란 것만 빼고는 이 둘의 주제가 하나로 지금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포트레이트의 연작에서는 병풍 그림을 연상케 함으로써 동양적 가치의 적자임을 알려주었다. 또한 랜드스케이프와 포트레이트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바위산과 나무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고 멀리 배경으로 산들이 펼쳐지는 모습에서는 정선의 <통천문암도>가 연상이 되었다. 겸재 정선이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새 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상대적으로는 서양화와 비교하자면 동양화의 범주에 있기에 서양인들이 본다면 비현실적이거나 환상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정선의 그림과 교감이 된다는 점은 열정과 인내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마치 검푸른 먹을 사용한 수묵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양화와 사진이 보여주는 ‘주객분리’의 성격은 ‘물아일체’를 지향하는 동양화와 다른 경향을 지니기에 ‘밖으로는 자연을 배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에서 얻는다’는 당대 수묵화가 장조의 말처럼 포기할 수 없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이 주제의 회복을 위해서는 경계와 실험의 시도를 멈출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의 이징이 검은 비단에 금물을 이용해 <이금산수도>를 남겼던 것처럼 새로운 시도는 새로운 실험과 매체의 희귀성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 시도가 걸작을 낳을 보장은 될 수 없을지언정 걸작의 출현을 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첨단매체와 솔루션을 활용하되 그것을 썼다는 마음마저 내려놓을 수 있을 때에 그 작품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지도 모른다. 동양화의 가치가 옛날 것이고 고루하다고 생각할 여지가 많은 요즘 시대에 숨겨진 매력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은 동양화를 한국화로 자신있게 호명할 수 있는 시기를 당긴다는 점에서, 한류의 영역을 넓힌다는 점에서 내적,외적 가치가 결코 작지 않다.

사진을 통한 동양적 아름다움의 추구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연상되더라도 대단한 일이지만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평원, 고원, 심원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 관념산수화의 영역으로 갈 수록 합성을 하지 않는 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 작가의 청산 주제에 의한 변주처럼 보이는 연작 형태가 이의 극복을 위한 서사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여러 장면을 통해서 현실에서 환상으로, 혹은 꿈속으로 갔다가 현실로 되돌아오는 내러티브를 구성한다면 웬만한 관념산수화가 부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점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마음과 그 내재적 가치에 있을 것이다.

<몽유도원도>를 그림으로 보든 미학적 가치로 보든 걸작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림의 기술을 넘어서서 안평대군의 꿈속의 이야기와 그 호접몽과도 같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조화스럽게 한 장의 그림으로, 내러티브로 구성한 안견의 마음때문일 것이다. 동양적 미학에서 마음의 수양을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임 작가는 블루 마운틴 작업을 하면서 이 장면들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관념산수화처럼 보인다고 했지만 여기에서의 관념은 말 그대로 상대적인 것이어서 사진과 한지의 조합을 통한 외적 역량과 그것을 심화시키는 내적 마음이 깊어질 수록 관념의 깊이도 더해질 때가 올 것이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이제서야 인생의 절반을 지나가는 임 작가의 미래에 기대가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삶과 세계는 모두 다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일체개고;一切皆苦),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제행무상;諸行無常), 그러니 육신을 지닌 나란 존재가 유일한 나라는 것마저 내려놓으면 우주의 나를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제법무아;諸法無我). 동양화의 매력을 접하다보면 위의 구절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다. 임 작가의 작품도 이 범주에 진입해 있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한국의 청산을 통해서 익숙했지만 못 보았던 새로움의 다름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다름은 보면 볼수록 자신의 심성과 다르지 않기에 한국의 산하로부터 자신의 심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산하는 사시사철 다르게 변화하며 질서와 변주를 만들어 낸다. 이 질서와 변주가 결국 세계와 우주가 돌아가는 모습이라면 대상과 내가, 산과 강이 둘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이란 내가 있고 대상이 따로 있어서 예쁨을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속의 일부임을 느끼게 될 때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이 다르지 않음을 알리는 것이 예술가 역할의 한 본령일 것이다. 블루 마운틴의 드넓은 장관 속에서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는 문명과 인간의 흔적은 그 주제의 일부일 것이다.

경쟁에서 조화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가치가 옮겨가고 있는 시대에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첨단사진기술과 전통한지의 조화 속에서 정신 중심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역설의 가치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사다리를 넘어 가서 참나의 발자국을 지나 진정한 자아를 모두가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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