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이 들려주는 네가지 길
율리시즈 2021/02/21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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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가는 길
- 임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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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0) - 2020-10-18
: 61
내가 보기에 지리산은 어머니같은, 뭇 생명들을 품는 넉넉한 산이다. 이쁜 것과 특색을 쉽게 나타내지 않지만 생명이 살아 있는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산이다.
이 점은 이 산이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의 5개 행정구역에 걸쳐 있는 넓은 공간으로서의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넉넉한 산이 한둘이 아니고 넉넉하지 않은 산이 어디 있겠냐만은 지리산을 생각할 때면 유독 그 넉넉함이 늘 다가온다. 모든 사람들에게 나름의 캐릭터가 보이듯이 인간들은 여러 산들에게 나름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마련인데 설악산처럼 화려하고 금강산처럼 풍광이 뛰어난 것에 비해 지리산은 얼핏 보기에도 이쁜 면으로 자신을 보이는 산은 아닌 듯 하다. 또한 이병주의 <지리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접한 이들이라면 지리산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같이 한 배경을 지닌 산이라는 점에서 이 산의 느낌과 성격을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게 바라보이게 만들지도 모른다. 사실 아름다움의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지리산은 외향적인 아름다움을 쉬이 내보이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끝자락으로 내려와 넉넉한 공간에 자리잡으면서 한편으로 심심하고 무심한 듯이, 생명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채욱 작가의 <지리산 가는 길>의 첫 번째로 수록된, 지리산의 병풍처럼 펼쳐진 작품을 펼쳐 보았을 때의 이 산은 일찍이 하서 김인후 선생이 얘기했던 산외유산산부진(山外有山山不盡; 산 밖에 산이 있으니 산이 다함이 없네)의 구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장관이다. 이 장면은 몇몇 특징에서 다른 산 사진들과는 차별점을 보인다. 마치 큰 종이로 산의 스카이라인을 그려서 가위로 오려낸 후 그 종이마다 검푸른 물감을 물들인 후 여러 장의 그 종이 산(?)들을 중첩시키면 이 작품과 얼핏 비슷해 보이지 않을까. 차이점이 있다면 생명이 살아숨쉬는 산을 담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작품의 이 지리산은 산들의 산, 드넓고 넉넉한 산, 어머니와도 같은 산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지리산의 특색을 이쁨이나 절경이라는 형태로 잘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곳이 지리산이라는 명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느 이름모를 산이겠거니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일반성이 지리산의 정체성과 보편성을 잘 보여준다. 얼핏 보면 동양화같기도 하고 검푸른 채색이 입혀진 추상화처럼 보일 정도로 특색과 구체적 아름다움이 거의 배제된 장면이지만 엄연히 실사를 담은, 그러나 넉넉한 지리산의 정체성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넓고 넓은 지리산을 담은 풍경들은 수도 없이 많고 사람마다 지리산의 느낌이 다를 터라서 한 작품만으로 말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동했고 지리산이 지닌 어떤 한 면을 잘 드러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집에서 1장 지리산 종주길은 지리산의 드넓은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지리산으로 입장하는 듯한 작은 숲길을 먼저 보여준다. 그 길에서 토끼도 만나는 장면도 정겹지만 마치 한반도 모양을 닮은 듯한 숲과 허공이 그려내는 모습의 장면에서 작가의 남다른 눈썰미가 느껴진다. 이어서 드러나는,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떠오르는, 줌아웃이 극대화된 지리산의 장관이다. 몇몇 장면에서는 조금 줌인하여 숲과 나무의 모습들이 드러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산세가 잘 드러나는 전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산위에서 오롯이 자태를 자랑하는 소나무들과 자연의 풍화에 거의 모든 것을 내주고 거의 줄기만 남은 채로 서 있는 고목과 이름모를 혹은 이름붙여졌을지도 모를 바위의 몇몇 장면은 살아있는 풍성함을 더했다.
2장 지리산 둘레길에서 임채욱 작가는 하동 평사리에 있는 부부송(나란히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대상이 지닌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임 작가는 무려 수십장을 할애해 부부송과 주변의 장면들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1년 후에도 5년 후에도 거의 그대로인 콘크리트 건물에 비해 1분 1초후에도 다르게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이 자연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모습이 소나무라는 정체성을 유지한다. 생명의 변화와 정체성의 성격은 늘 인간들에게 영감을 준다. 바라보는 그 시선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부부송의 여러 장면들 중에서 하얀 새들이 나무 위에서 쉬고 있는 장면은 너무나 정겨웠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도보여행을 할 수 있는 총 300여km에 이르는 순환의 순례길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훌륭하지만 지리산 둘레길도 산티아고와 단순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순례길이다. 그곳을 지나다보면 이 매력적인 부부송을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임 작가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자칫 산악열차 건설이라는 자연의 파괴 앞에 없어질 지도 모를 부부송 주변의 풍광을 애정어리게 수록했다. 2장만 보더라도 임채욱 작가의 사진집이 여러 평범한 풍경사진집(?)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장 지리산 실상길에서 작가는 가장 인간적인 줌인으로 내려와 지리산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실상사의 모습과 그 곳의 도법 스님과 그 분이 조성해 놓은 실상길을 비춘다. 지리산의 넓이와 둘레길의 사이즈(!)에 비하면 작고 짧기 그지없는 공간이지만, 쌀 한톨에도 우주가 담겨있듯이 그곳에도 자연과 인간의 세계가 온전히 들어 있다. ‘넓은 절 마당, 푸르른 소나무, 고요한 눈빛, 가벼운 발걸음, 그리고 온 실상사, 온 세상, 온 우주와 함께’라는 도법 스님의 시처럼 신비한 작은 길은 삶과 구도의 길과 자연의 길이 다른 듯 하나임을 보여준다. 수행을 위해서는 별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얘기들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곧 수행과 다르지 않다. 다만 삶이 수행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의식하는 것은 결과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며 삶을 바라보며 의식을 한다면 삶의 시간은 조금 더 알차게 흘러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실상길은 우리 모두가 걸어가지만 길을 걷는다는 것이 수행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일깨우는 작은 길이 아닐까.
4장 지리산 예술길에서 임채욱 작가는 작품의 소재와 방식을 2차원적인 공간에만 한정시키지 않는 면을 보여준다. 지리산 풍광을 배경으로 인간문명과 문화의 활동이 동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시청각적 작품은 여러 작가들이 시도하는 것이기도 한데 자연과 문명의 한 가운데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며 간접체험하는 느낌을 주는 듯 하다. 이 체험은 온라인, 오프라인의 경계를 넘고 대화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서 자주 시도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어떤 변화든 시도이든 간에 지리산같은 자연이라는 배경은 늘 넉넉한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임채욱 작가는 마지막 작품에서 첩첩산중의 지리산을 다시 한번 펼쳐보인다. 이때의 장면은 처음 작품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처음 작품은 지리산이라는 자연만을 보여주었다면 마지막 작품은 마을군락을 이루는 인간의 문명, 문화와 함께 하는 지리산을 보여주었다. 크게 본다면 우리는 자연과 함게 사는 것이 아니라 드넓은 자연 속에서 아주 작은 공간에 자리잡고 앉아 자연의 혜택을 받고 사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연파괴를 걱정하는 것은 자연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터전이 파괴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연은 파괴되지 않는다. 인간이 없어지더라도 자연은 회복될 것이고 리듬을 지키며 순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인간조차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드는 인간문명을 걱정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지리산은 좌충우돌하는 인간과 문명을 바라보면서도 보듬고 품에 안아주는 넉넉한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사진집의 장마다 수록된 표문송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 박남준 시인, 이상윤 숲길 이사, 도법 스님, 최연하 큐레이터, 도서출판 아트제 김종필 대표, 임채욱 작가의 글들도 진솔함과 진정성이 잘 드러나 많은 것들을 성찰하는 계기를 준다.
점점 한류의 영역과 영향력이 커지는 시점이지만 여전히 출판시장의 환경은 녹록치 않다. 입시와 참고서, 실용서 위주의, 비정상적으로 쏠려있는 출판환경에서도 예술과 문화의 가치를 알리고자 뛰어드는 사명감을 지닌 아트제와 같은 출판사와 김종필 대표를 보노라면 그 용기와 열정에 고마움과 박수를 드리고 싶다.
작곡가인 구스타프 말러가 혹독함에 가까운 지휘활동과 공연의 일정 속에서도 짬을 내어 오스트리아의 아터제라는 호수가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자연을 벗삼아 작곡의 시간을 내고 교향곡 3번과 같은 불멸의 작품을 남겼듯이 소명을 지닌 출판사의 기획과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휴식과 위안과 영감을 줄 것이다. 위안과 영감을 받을 독자들이 할 일은 그저 이들에게 큰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속가능한 존재로 남을 수 있도록 애정과 관심을 잃지 않는 일일 것이다. 복지사회를 지나 본격적인 문화사회로 가는 길이 백범 선생의 언급처럼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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