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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율리시즈
  • [전자책]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 박산호
  • 9,800원 (490)
  • 2020-12-01
  • : 20
‘누구에게나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일이 하나씩은 있다. 식구들이 먹을 밥을 짓는 일, 아침마다 이불을 개고 걸레로 방바닥을 박박 닦는 일, 운동화 끈을 묶고 동네 한 바퀴를 달리는 일, 신문의 잉크 향을 맡으며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기사 하나를 꼼꼼히 읽는 일, 좋아하는 화초에 물을 주며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다정한 얼굴을 보여주는 일.’

- 박산호 지음, 도서출판 지와인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그런 일이 하나쯤 있지’ 편에서.

이제 막 어른이 되어 가는 딸 릴리와 시크하기 짝이 없는 고양이 송이와 입양한지 얼마 안된 강아지 해피와 살고 있는 엄마이자 번역가인 박산호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평범과 비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흐릿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책의 소개에도 나온 것처럼 현재 한국의 가족형태는 1인이나 2인 가족이 3인이나 4인 이상의 가족보다 더 많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오순도순하게 사는 가족형태는 여러 형태의 하나일 뿐 이제 더 이상 주류라고 할 수도 없고 모범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있을 건 있어야 하고 갖추어야 할 것은 갖춰야 한다면 세탁기와 냉장고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저자의 글을 통해 나타나는 딸 릴리의 모습은 발랄하고 총명하다. 때론 수긍하고 때론 반대하지만 엄마와 딸이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모습은 너무나 일상적이면서도 너무나 아름답다. 서로 좌충우돌하면서도 서로를 솔직하게 바라봐주고 성장시켜주는 모습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솔직히 이런 관계는 적지 않은 많은 모녀들에게 로망이 아닐까. ‘완벽하지 않은 여자와 아직 자라고 있는 여자’라고 소개되었지만 내가 보기엔 우주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온 성숙한 영혼들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삶과 인간관계에 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지칠 줄 모르고 나아가며 배우는 것 같다.

저자가 딸과 고양이와 막 가족이 된 강아지와 사는 모습이 이미 평범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족은 무엇인가 비범하다. 주된 이유는 가족과 삶을 바라보는 저자의 넒은 안목과 지혜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글은 잔잔하면서도 문득문득 드러나는 삶의 지혜와 빛이 드러난다. 저자의 지혜는 결혼과 이혼, 딸의 출산, 영어교육에서 번역분야로의 진출 등등 여러 변화의 와중에 진전되었을 테지만 이런 삶의 소재가 항상 지혜의 소재가 되지는 않는다. 누구는 슬퍼하고 누구는 원망하고 누구는 후회한다. 그러나 몇몇 이들은 이런 경험을 결국에는 지혜의 소산으로 받아들인다. 아마도 저자는 이런 존재일 것이다. 이것은 주체적인 영혼이 자리잡고 있기에 가능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쉽지 않은 길임에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제일 위의 인용문처럼 일상의 소중함을 간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번역하기도 했던 ‘매튜 스커더’ 탐정 시리즈에서처럼 매일매일 커피와 신문, 지하철과 도서관, 호텔과 술과 책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아날로그적인 일상은 저자에게도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편인 ‘우리들의 리추얼’처럼 주말 오전에 딸 릴리와 보내는 브런치의 시간은 이 일상의 리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자 삶을 재충전시켜주는 시간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존재하는 모든 일상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일상은 리듬을 담고 있다. 일상의 리듬은 비범을 예고하고 리듬 속에 빛나는 부분은 삶의 미래가 더 충만할 것임을 암시한다.

박산호 작가는 스릴러장르의 문학을 포함한 수십편의 작품을 번역하고 에세이 등을 낸 중견작가이다. 그녀의 수많은 다른 번역작품을 접한 적이 없는 채로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미안하면서도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반갑다. 바다에 사는 ‘산호’는 책에도 나온 것처럼 18세기까지 식물로 오인했다가 석회질 골격이 있다 해서 광물로 여겨졌다가 최종적으로는 동물이라는 정체성이 밝혀진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한다. 이름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산호가 인간들에게 알려지는 과정이 변화무쌍했던 것처럼 저자에게 삶의 여러 우여곡절과 변화가 있었음은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결혼했지만 나름의 이유로 남편과 헤어지기로 한 것은 슬프고 아쉬운 일이었을 테지만 작가만큼 총명한 딸 릴리를 키우고 있는 것은 저자에게 가장 큰 보람의 하나일 것이다. 그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저자의 영어에 대한 능력과 과정을 볼 때 교육영역에서 나름 잘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었을텐데 한국의 출판환경에서 쉽지 않은 번역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디지만 조금씩 더 좋아지려는 경향을 보이는 출판영역에서 저자같은 번역가들과 작가들에게 더 밝은 미래가 있기를 고대해 본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딸이 완전히 독립하다 보면 저자의 삶은 또다른 시기를 맞이할 것 같다. ‘내 안의 올렌카’에서도 언급했듯이 누구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다른 의미에서 나를 주체로 내세우는 것, 그러면서 새로운 삶과 인간들과 여러 형태의 경험들이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듯 하다. 그때에 딸 릴리는 떨어져 살거나 혹은 근처에 살겠지만, 그때에 새로운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식구가 되겠지만, 저자는 새로운 친구들 혹은 애인을 만나겠지만 주체적인 ‘나’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가 조금 더 부상할 것 같다. 그때의 삶과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게 될 저자의 다음 작품을 일찌감치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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