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라는 강대국은 수많은 위기와 전쟁,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 피어난 치열한 기술 경쟁을 자양분 삼아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알렉스 카프의 『기술 공화국』은 바로 그 자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불편하고도 솔직한 경고다.
카프가 던지는 핵심 명제는 단순하다. 기술은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기술이 좋은 방향으로 쓰일지,
나쁜 방향으로 쓰일지는 기술 자체가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그것을 손에 쥔 국가와 집단의 의지가 결정할 뿐이다.
이 명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문제는 선명해진다. 민주주의 국가가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국방 기술 개발을 외면하는 사이, 그 빈자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들이 채워간다.
선의가 패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카프는 이러한 현실의 원인을 미국 기술 생태계 내부에서 찾는다. 그의 시선은 특히 실리콘밸리를 향한다.
냉전 시대에는 테크 업계와 국방부가 긴밀히 협력하며 미국의 기술 우위를 함께 만들어 냈지만, 이후 테크 기업들은 정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한때 혁신의 메카였던 실리콘밸리가 이제 국방 기술을 비판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며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1등이 주는 안락함이 있다. 지금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유지되어 왔는지를 잊은 채, 그 열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안일함이다. 카프는 이러한 망각을 경계한다.
그가 국가를 강조하는 이유는 미국의 공화정 시스템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겪어왔지만,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제도적 기반을 유지하며 고비를 넘겨왔다. 강력한 법치와 정치 제도의 울타리 위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고, 오늘날의 기술 혁신 역시 그 단단한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카프의 주장은 단순한 군사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기술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당연히 반론도 따른다. 팔란티어가 방위산업과 깊은 연관이있는 기업이라는 사실은
그의 주장이 자사 이익을 위한 논리로 보일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장의 출처가 아니라 그 내용이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느냐다. 최근 미국 정부가 첨단 AI 기술과 모델에 대한 수출 통제를 강화한 것은 카프의 문제의식이 현실의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美, 첨단 AI 외국인 접속 차단… “中 연계 의심 한국통신사 탓”앤스로픽의 AI모델 ‘미토스5·페이블5′ 규제 발표 WP “中 연계 의심 한국통신사 발견이 결정적 계기” 미국 정부가 앤스로픽의 최상위·고성능 인공지능(AI) 모델인 ‘미토스5’와 ‘페이블5’에 대한 외국인 접속을
n.news.naver.com
AI는 이제 하나의 산업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전략 자산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AI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주항공과 바이오를 비롯한 미래 산업 역시 기술 혁신의 무대인 동시에 국가 간 패권 경쟁의 최전선이 되고 있다.
『기술 공화국』은 낙관을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 패권 경쟁 앞에서의 방심을 경계한다.
책을 덮고 남는 것은 기술과 국가 안보를 함께 고민하는 기업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작은 희망과
그보다 훨씬 큰 경각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