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관심 많은 독자라면 다 늦게 또 무슨 힉스냐 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힉스 입자 발견이 이슈가 된지도 이미 한참이 지났다. 외국 저자들이 쓴 묵직한 책도 이미 여럿 나왔다.
제목에서 예상되다시피, 이 책은 힉스 입자에 관한 이야기다. 힉스입자의 발견 당시의 이야기부터, 힉스입자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입자물리학, 미국과 유럽간의 경쟁, 그를 위한 거대 실험설비에 관한 설명, 그리고 앞으로의 연구방향까지. 힉스입자를 둘러싼 전체적인 그림을 머리에 넣고싶은 사람이라면 권함직한 책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은 덤이다.
아무래도 이 책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은 아마 4장 '바벨탑의 사회학' 중에 소개된 저자의 경험담이리라. 저자는 LHC에서 관련연구를 하는 경북대 김동희 교수다. 그는 이 연구주체가 얼마나 거대한 연구집단이었는지, 또 그들간에 얼마나 치열한 경쟁원리가 도입되어 있는지를 본인의 진땀나는 경험담을 통해 들려준다. 저자가 같은나라 사람이라 그런걸까, 아니면 원래 저자의 블로그에서 나온 책이라 그런걸까? 저자의 경험담은 어느 대단한 과학자의 일화같지가 않고, 여느 사람 사는 모습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연구해서 먹고사는 어느 친한 형님이, 야, 대학교수쯤되면 편할 거 같지? 이 세계도 나름대로 힘들다며 들려주는 이야기같기도 하다. 과학은 과학자들에게 살아가는 '현실'이다.
김동희 교수의 경험담은 지금을 사는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현실이 어떤지 생각하게 한다. 아쉽게도, 그런 저자 본인의 경험담은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다. 길게 보면 4장과 5장, 짧게 보면 4장의 '필자가 몸으로 겪은 논문 출판 경쟁' 파트에 국한된다. 그의 진땀나는 경험담은 현재 과학은 거대 자본을 끌여들이고, 죽고 죽이는 경쟁 원리 속에 자신을 몰아넣어야 하는 그런 과학임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장면이다. 이 장면 하나만 반복해서 읽으려고 지금도 이 책을 옆에 끼고 있다. 이런 경험담을 더 많이 들려줬더라면 어땠을까. '우리 과학자가 들려주는'이라는 부제목을 본 독자라면 그런 것을 더 기대하지 않을까?
거기에 덧붙여, 좀더 우리 사회와 밀착한 이야기를 꺼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세계적인 연구환경을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또다른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나라 과학 발전의 방향성에 대해 뭔가 말해 줬더라면. 100층짜리 건물을 올리는 일보다, 강바닥을 파헤치는 일보다 더 목마르게 투자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음을 보여줬더라면. 아니, 그런 얘기는 너무 나간 것 같다. 100층짜리 건물도, 강바닥 토목공사도 어쩌면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대로 들려줄 새로운 얘기가 있지 않았을까?
과학에 있어서 7~80년대는 낭만의 시대였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그 때였고, 외우주를 향해 보이저가 출항한 것도 그 때다. 그 갸냘픈 쪽배에 만날지 못만날지도 모를 외계의 누군가를 위한 인사를 실어 보냈더랬다. 그 낭만은 <바람이 불다>의 주인공 지로의 비행기처럼 (비록 당장 불을 뿜는 포화는 아닐지언정)냉전시대의 정치역학 위에 불안하게 올라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정치가들에게도 과학은 다른 의미에서 낭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순수한 꿈이 낭만이었겟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국가와 민족의 번영이 또다른 종류의 낭만이었다. 과학은 그 낭만을 위해 존재하고 발전했다. 이 책에 나타나는 저자의 경험담은, 지금은 '자본주의'가 움직이는 과학의 시대임을 실감하게 한다. 거대 자본을 끌어들여야 하고, 세계 경제가 침체된 가운데 국가를 설득해야 한다. 과학자들도 경쟁의 원리속에 연구해야 한다.
사람들은 힉스가 이슈였었던 줄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 모든 학문이라는게 다 같이 가게 마련 아닌가. 이 책은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이 점을 비판할 수는 없다. 그랬더라면 전혀 다른 책이 되었을 것이니까. 그런 부분은 다른 책이 채워주면 되는 부분이니까. 이 책은 순수하게 과학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지만, 저자의 경험으로 들려주는 힉스입자 발견 이야기, 그리고 이후의 세계적인 과학 연구 방향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서도 들어둘 가치가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