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친다. 페이지마다 화려한 극락조 그림들에 눈이 다 황송하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다. 게다가 '잘못된 그림'이다! 실제 극락조는 이런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고 본문에 떡하니 나와 있다. 그런데도 오류를 바로잡아줄 실물 사진은 단 한 장도 싣고 있지 않다. 거참, 극락조 책인데 극락조 사진 한 장이 없다니?
<낙원의 새를 그리다 - 극락조의 발견, 예술, 자연사>는 극락조가 중심이지만 극락조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극락조를 만나는 인간에 관한 책이다. 17세기에서 20C 초중반까지, 극락조가 유럽인들에게 소개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당시 유럽 세계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목차는 생물학적 분류인 '과'단위로 되어 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 그보다는 그 종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인간 군상들의 행동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극락조 장식깃을 유럽인들에게 건네었던 원주민, 그 장식깃으로 부와 명예를 얻으려 정글로 달려간 탐험가, 탐험가들을 지원하고 명예를 사는 스폰서(주로 왕족과 귀족들), 수입된 극락조 장식깃으로 치장하고 사치를 과시하는 소비자(주로 귀부인들), 신종을 분류하고 도감을 발간한 박물학자와 그들을 위해 제한된 정보를 상상력으로 채운 그림을 그린 화가들.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은 당시 화가들의 그림들이다. 정보전달 수단이 글과 그림 뿐이던 그 시대에 극락조의 외양, 행동 등 정보를 전달할 목적으로 그려졌다. 사진이 없던, 혹은 기술적으로 부족하던 시대에는 그림이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시 사람들로서는 이런 그림을 보면서 극락조의 모습을 열심히 상상하는 수 밖에 없었다. 책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사실 정보 전달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데 그림이 사진에 비해 항상 열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 이미 발달한 20세기 중후반까지도 Time지와 같은 주요 잡지에는 이 방면의 전문 화가들의 그림이 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실물을 확인하고픈 욕구를 그림만 가지고는 완전히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당시처럼 극락조의 실제 사진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글과 그림만으로 정보를 제한한다는 점이다. 멸종한 공룡도 아니고, 극락조는 분명히 현재에도 살아있는 현생종인데 그런 극락조를 그림으로만 보고 있자니, 읽을수록 확인하고 싶어 감질난다. 몇 번이고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 책은 끝까지 사진을 배제하고 그림과 글로만 묘사하는 옛 방식을 굳이 고수한다. 이 책이 다루는 바로 그 시대의 방식이다. 이렇게 정보가 제한된 방식은 정보 전달에 더 효과적인 다른 수단(사진이나 동영상 등)이 존재하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정보 전달'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지 몰라도, 확실히 상상력을 자극하는 맛이 있다. 글 만으로 우리는 극락조의 환상적인 빛깔을 상상하고, 화가들이 그린 수려한 그림에 우리의 상상으로 그 빛깔을 덧씌운다. 당시 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신비감에 부풀었으리라. 얼마나 두 눈으로 보고 싶었을까. 처음 깃털가죽을 보았을 때, 그들은 날개도 다리도 없이 영원히 공중을 날며 이슬을 먹고 사는 그런 새를 상상했었더랬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제공하는 경험은 매우 특별한 것이다. 극락조에 대한 정보를 당시의 방식으로 제한한 덕분에 현재의 우리도 그 당시처럼 극락조를 만나는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제한된 정보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는 정말로 당시 유럽인들이 느꼈음직한 경외심, 신비감, 호기심으로 극락조를 대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알려진 것이 적은 극락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낙원의 새를 그리다 - 극락조의 발견, 예술, 자연사>는 극락조가 아니라 극락조를 매개로 제국주의 유럽인을 살펴보는 책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자연과학이기보다는 인문학이지만, 평범한 지식 전달 이상으로 그들의 감정을 전달해 그들을 이해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문학과도 비슷하다.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는 책이다.
마지막 챕터에서 '잡종'을 다루며 이 책은 끝난다. 극락조는 종들 사이가 유전적으로 가까운 탓에 유난히 잡종이 많다. 그런 탓에 극소수의 표본만이 채집된 채 다시는 발견되지 않은 것들은, 잡종인지 새로운 종인지도 확인하기 힘들다. 귀부인들의 모자장식이 되느라 많은 수의 극락조가 남획되었는데, 그 통에 멸종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역사적 맥락에서은 당연히 이 시대에 대해 그리 좋은 평가가 내려질 수는 없다. 이 시대에는 인간의 탐욕에 의한 파괴가 일상적인 시대였고, 심각성도 모르던 시대였다. 아름다운 그림들을 감상하며 그들의 경외감을 함께 느끼다 보면 불편한 진실은 잠시 잊게 된다. 하지만 그런건 잠시 보류하고, 제국주의시대 유럽인이 되어 보기를, 그들도 우리같았음을 음미해보기를 권한다. 살고 있는 당대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극락조를 보며 경외감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 편으로 그 것을 파괴하면서도 말이다. 우리도 우리 시대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미화하고자하는 욕구를, 우리와 과거의 저들과 다른 점을 찾아내 그 차이를 확대해석하고픈 욕구를 느낄 수도 있다. 제국주의시대 사람들도 그들 스스로는 위대한 탐험이라고, 인류 지성의 커다란 진보라고 여겼을 것임을 상기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