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앞을 지나는 택시 안 우는 여자의 얼굴이 시인의 마음에 오래 머무른다. 시인에게 세상의 모든 사물은 수도원의 수사(修士)와도 같은 존재이다. 삶은 봉쇄수도원처럼 단절되고 고독한 공간이며, 그 안에서 존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수도원의 성스러움이 구석구석 미치기에 현실이라는 공간은 너무나 누추하고 비루하다. 시인은 그 남루한 삶 속에서 구도와 구원을 꿈꾼다.
시인에게는 죄의식이 많다. 세속에서 구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시인의 양심은 늘 시인을 몰아붙인다. 그것은 세속과 출가에 마음을 하나씩 걸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회한일 수도 있고, 삶과 수행이 생각처럼 나란히 가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죄의식일 수도 있다. 시인은 문학에 대해, 삶에 대해 결벽하기를 바란다. 삶의 한결같음을, 몸과 마음의 일치를, 삶에 대해 늘 깨어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세계는 필연적으로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고, 수행은 현실의 방해를 받으며, 언어는 사물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기 마련이다. 시인은 삶과 세계의 합일을 위한 고독한 투쟁을 벌인다. 시인은 “얼마나 더 싸우고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지복의 저 풍경 속에 가 닿을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나는 나를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을 믿지 못하고 내 영과 혼은 자꾸 나를 떠나려고” 하고 “몸은 마음을 멀리하고 마음은 또 저를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힘이 든다.
삶속에서 구도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에게 일상에서의 각성은 때로 자욱한 피비린내처럼 찾아온다. 치열한 사색 속에서 얻어진 시인의 언어는 절제되어있고 담백하다.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고요하고 진지하고 정갈하다 못해 오히려 성스럽다. 수도자처럼 묵언하고 싶은 욕망 속에서 벼려진 결벽의 언어이다.
삶과 수행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유난히 맑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기에 결벽이란 말을 썼지만, 여기서 쓴 결벽이란 말이 그와 반대되는 것에 대한 혐오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에게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함께 수행해나가는 도반(道伴)이며, 연민의 대상이다.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다. 특히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들, 가려진 존재들, 눈에 띄지 않는 사물들이 시인의 마음을 흔든다.
새로 나온 푸른 이파리들보다도
그 뒤에 숨어 있는
뒤틀리고 구부러진 나뭇가지들에게
더 자주 눈길 건너가고
가슴 먹먹해지나니
이 서러운 묵언의 나뭇가지들
꼭 쥐고
어루만지나니 그 누구의
몸인 듯 마음인 듯
「 나뭇가지를 꼭 쥐고」끝부분
시인은 이처럼 가려진 사물을 들춰내고 보듬어주고 싶어 한다. 눈에 띄지 않는 존재에 대한 연민은 출가하고 싶은 시인의 발목을 붙잡는다. 홀로 해탈을 구하지 말라고 한다. 시인의 세계에서 지고한 것에 대한 갈구는 미천한 존재에 대한 연민과 맞닿아 있다. 시인에게 신(神)은 산 밑 작은 호숫가에서 마주친 “철없는 황갈색 영혼의 몸”에도, “몇 줌 시린 햇볕에도 한없이 떨며 깊어지는 극빈의 그늘 속에”도 편재한다. 그러나 이런 사물이 단지 작고 힘없는 존재만은 아니다. 「대물(大物)들」의 물고기들은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음험하고 알 수 없는 존재인데 이들은 때로 “자진하듯이” 빈 낚시를 물고 나오며 삶의 불가해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검은빛 본다」에서 이런 존재들은 “삶도 죽음도 다 떠나버린 것 같은” 곳에서 “죽음을 살아낸 메마르고 풍성한 빛”을 보이는 지극한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은 또한 시인을 위무하며 함께 아픈 세상을 견디는 존재이기도 하다. 시인이 힘들어 할 때 “어느 새 내 곁에서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보다 더 공손하게 절을 올리”며 대속(代贖)하는 존재이다. 시인에게 밥상머리에서 마주하는 “은산철벽”을 견디게 해주는 존재들인 셈이다.
자신이 불러낸 이름 없는 존재들에게 시인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치유와 사랑이다. 시인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고 고뇌했던 존재들의 “아프게 금이 가는 가슴 한쪽을 오랫동안 쓸어주”고 “그 끝에 반짝이는 검은 우물을 들여다보”려 한다.
결벽이 세계를 대할 때 시인이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자세라면 이처럼 시인이 이 세상에 바라는 것은 화합이다. 결벽과 화합이라는 두 가지 명제가 모순 없이 시인의 시 속에 녹아 있다. 거기 이르는 과정이 경건한 기도처럼 진실하고 절절해서 우리를 깊이 공감하게 한다.
이제 40대를 살고 있는 시인은 다른 존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삶도 너그럽게 포용하려 한다.
살아남은 한쪽 가지에 어린 꽃망울들
수줍게 매단 살구나무의 저녁은
멀고도 깊어라, 그곳에는
가출한 고양이들도 살고
시골 병원 6인실에서 만난 아버지의 죽음도 살고
오늘 하루도 헛살았구나, 입술 깨문
후회도 살고 있으니
나는 그 옆에 이복형제처럼 앉아
담배 연기를 맛있게 내뿜곤 하지
「살구나무의 저녁은」 부분
잔바람에도 파르르
몸을 떠는
흰 꽃잎 한 장 만나러
세상에 왔구나
겨우내 얼음장 하늘을 쩡, 쩡 깨뜨리던
새들의 핏멍 든 날갯짓 소리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이 시리디시린 빛의 여울목에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더러는
상처를 핥듯
더운 혀의 사랑을 나누고
숨 막히는, 숨 막히는 울음 끝에 목청을 틔워
나지막한 노래 한 자락
펼치며
먼 길을 돌아 왔구나
어느새 젖가슴 봉긋한 아이의 손을
부적처럼 꼭 쥐고
왔구나
「앵두나무 아래 중얼거림」전문
살구나무 아래에는 시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시인은 자신의 과거를 긍정하는데 이는 “제 울음을 환히 밝힌 사랑의 빛들 전등하듯” 삶과 죽음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앵두나무 아래 중얼거림」에서 삶에 대한 긍정과 화해는 더욱 두드러진다. 먼 길을 돌아 왔으나 시인은 결국 스스로가 걸어온 길이 자신이 바라던 삶의 길과 통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부적처럼” 꼭 쥔 손이 있어서 더디지만 더욱 의미 있는 길이다.
예술에 대한 허기는 작곡가 윤용하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시인에게 시를 불사르게도 한다. 시인은 그 허기를 “거룩한 허기”라 명명했다. 자신의 시를 앞에 두고 또다시 시인은 결연해진다.
자신의 시를 불태우는 결연함 끝에 시인이 마주친 것은 사랑처럼 견딜 수 없는 허기, 허기처럼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다. 시인에게 시를 쓰게 하는 거룩한 허기이다.
한밤을 새우고 술 마시러 가는 이여
한밤을 꼬박 앓고 술 마시러 가면서
현관에 흩어진 크고 작은 신발들
가지런히 모아두는 이여
이제 곧 사랑이 찾아오리라
세상에 나와
마음껏 울음 한번 울어보지 못한 자의
크나큰 울음과도 같이
그 울음 뒤의 못 견디는
못 견디는
허기와도 같이
「국화꽃 졌으니 」끝부분
개인적인 아픔 때문에 시를 쓸 수 없던 몇 년 동안 시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난 시가 농익은 과일처럼 터져 나왔다. 시인을 허기지게 했던 시는 이제 우리를 허기지게 한다. 고독과 슬픔, 그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과 진실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