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이제 ‘매트릭스’ 같은 영화 속 현실이 아니다. 2016년 알파고는 딥러닝 방식을 대중화했다. 2017년 구글 트랜스포머의 등장을 거쳐, 2022년 드디어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렸다. 소설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20년 뒤, 가까운 미래에 인류에게 닥친 위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에 밀려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방황한다. 이들의 가난하고 남루한 삶 속에서도 과연 사랑은 가능할까.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을까.
소설 ‘가난한 사랑의 미래’와 저자 이아타
최고의 인공지능 비욘드의 탄생을 알리며 소설은 시작한다. ‘나(정오감)’는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며 힘겹게 살아간다. 뉴스에서는 세계적 가수이자 플랫폼 스타인 스카이가 969번째 비욘드를 인수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현실 세계에서 마주칠 일이 없는 두 사람은 운명처럼 조우한다. 생활반경도 동선도 다른 그들이 만난 일은 ‘불규칙 바운드’에 속한다. 인공지능의 예측도 여전히 우연이란 변수를 가늠할 길은 없었다.
2023년의 세계는 암울하다. 휴머노이드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많은 사람이 가상현실 네트워크에서 시간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좀처럼 그런 일에 적응할 수 없는 오감과 같은 사람들은 비먼(비포 휴먼)이라 불린다. 불행한 사건으로 부모와 언니를 잃은 오감에게 생은 허망하고 무의미하다. 사회는 자살을 불법이자 범죄로 규정한지 오래다. 촘촘한 시스템의 감시를 뚫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감은 사고사를 위장한 자살을 꿈꾼다. 오감은 죽음을 철저하게 계획하고 연출하려 애쓴다. 홀로 남을 조카에게 불이익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생이란 한 치 앞도 예감할 수 없다. 오감은 할머니의 고향인 아진도로 걸음을 옮긴다. 해안가 절벽에서 죽음의 춤을 추며 발을 헛디딘 척, 바다로 뛰어내린다. 그때 오감의 추락을 발견한 휴머노이드가 물에 뛰어들어 오감을 구한다. 하필 스카이가 경호 휴머노이드 비토를 데리고 섬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오감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오감은 스카이와 마주한다.
섬에서의 인연을 계기로 오감은 스카이의 일을 도와주게 된다. 아진도를 사들여 편안하게 쉴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스카이의 오랜 바람이다. 과학 기술의 때가 묻지 않은 아진도는 인공지능의 간섭에서 벗어나 오롯이 홀로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할머니의 친구인 애심 할머니에게서 섬에 남은 마지막 부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이 오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한편 정체불명의 단체 아함에 속한 김이채가 접근하며 오감은 혼란에 빠진다. 김이채는 인간의 몸에 인공지능을 가진 ‘트랜스 휴먼’이다. 김이채는 죽은 언니가 아함의 멤버였음을 알리고 오감에게 합류를 요구한다. 휴머노이드들이 일으킨 파업이 거대한 혼란의 서막을 열며 소설은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소설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로서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전작 ‘베이츠’를 닮았다. 소설은 독자에게 묵직한 철학적 문제를 제시한다. 소설에서 인간과 ‘포스트 휴먼’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인간과 그들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한 사회의 고민은 부재한다.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미덕뿐 아니라 잔인함과 공격성마저 공유한다.
휴머노이드는 인간처럼 감정을 느낄 뿐 아니라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 각자에게 개성을 부여한 주체는 인간이지만, 예상치 못한 여러 과정을 통해 그런 개성은 변화되거나 강화된다. 휴머노이드는 점차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어 간다. 그들의 면면은 인간과 흡사하다. 신경증을 앓는 휴머노이드가 등장하는가 하면 체제 전복을 꿈꾸는 휴머노이드가 탄생한다.
대다수 휴머노이드는 적게 일하는 걸 원했다. 일상을 누리고 친구를 만나고 산책하고 운동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답게 사는 것을 원했다.
-본문 84쪽
소설에서 휴머노이드와 인간은 서로 끈끈한 우정을 나누고 깊이 공감한다. 오감의 조카 은비는 휴머노이드 ‘이아고’와 어울리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한편으로 인간과 휴머노이드는 서로 의심하고 반목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저자는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차이에 관한 질문을 통해 인간성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 묻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간과 같은 물리적 형체를 갖추지 못한 최고의 인공지능 비욘드가 ‘진정한 육체의 행복’을 느끼려는 것이다. 비욘드가 ‘우리는 모두가 신’이며 ‘육체 없는 저 역시도’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했던 사실과는 이율배반적이다.
“행복이 뭔지 넌 알아? 난 수많은 육체를 딥러닝하고 시뮬레이션했지만, 진정한 육체의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어. 내 삶의 유일한 아쉬움이지.” -본문 247쪽
‘감각과 감정은 자연과 가장 가깝’고 ‘인간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또 사랑을 갈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인공(人工)의 산물이 원하는 것은 감각과 감정을 통해 삶을 향유하는 즐거움이었다. 주인공의 이름 오감은 풍부한 감정으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붙여준 것이다. 주인공이 오감(五感)을 통해 자연을 느끼며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는다는 점에서 그의 이름은 중의적이다.
휴머노이드가 일으킨 혁명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날로그’의 소산이다. 자율주행차량이 주행하지 않을 때, 오감이 모는 할리데이비슨은 멈추지 않는다. 유선 전화기는 유일한 소통 수단이 된다. ‘쓸모없는 게 쓸모있는’ 상황이며 과거의 소산이 테크놀로지를 역전하는 순간이다.
소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역시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역설하는 러브스토리이기도 하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죽음을 바라던 오감은 삶을 택하기로 마음이 기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결이 있는 한 인생은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다. 저자가 말하는 ‘가난’은 경제적 궁핍과 더불어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다. 과거, 역사, 자연, 타인과의 연결을 끌어안지 못한 삶은 결코 부유할 수 없다.
‘죽음의 극장에서 죽음을 꿈꾸는 휴머노이드를 목격한 후 나는 더는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죽음이란 삶의 그림자여서 꿈꾸지 않아도 늘 가까이 있었다. 오래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은 내가 자살을 꿈꾼 것은 내 그림자를 내가 자르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본문 212쪽
스카이는 ‘나’의 추억이 깃든 아진도의 옛 흙집을 그대로 두기로 함으로써 ‘자연과 과거를 끌어안은 미래를 선택’한다. 그런 행위를 통해 그들의 미래는 빈곤하고 공허하게 남지 않게 된다. 소설은 또 한 명의 스카이를 등장시키면서 동일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끔 한다. 유전공학으로 태어난 ‘스카이2’는 그의 아바타이자 희생양이었다. 스카이와 은비는 다른 인간에 의해 유전정보가 복제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신체와 심리 상태가 같은 두 존재를 구분하기 위해 필요한 논리는 무엇일까.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에 가볍지 않은 철학적 사유를 녹여냈다. 과학 기술이 진보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가난해진다. 촘촘한 시스템은 인류를 감시하고 인간에게는 죽음의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네트워크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며 인간과 인간의 연결은 인공지능조차 예측할 수 없다. 인생은 불확실성을 통해 더 역동적이고 가치 있는 무언가가 된다. 그리고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이 있는 한, 사랑의 미래는 가난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 이아타는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해서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심훈문학상, 현진건문학상 우수상, 신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작품집으로 ‘사월에 내리는 눈’, ‘월요일의 게이트볼’이 있고 브런치북에 ‘청바지와 사랑’을 게재했다.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신진 스토리 작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세상에 나온 ‘베이츠’에 이어 저자가 쓴 두 번째 SF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