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나는 어떤 만성 질환을 진단받았다. 대부분의 만성 질환이 그렇듯이 병이 완치될 가능성은 없었다. 치료는 단지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이었다. 남은 생애 내내 성가신 추적 검사와 그에 동반한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내 병세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병에 걸릴 가능성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되었으나 그 징후가 발병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1~2%에 불과했다. 노인성 질환으로 흔히 알려진 그 병에 걸리기에는 나는 아직 젊었다. 하루아침에 나는 몹시 불운한 사람이 되었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걸까. 불행과 맞닥뜨린 모든 사람이 그러듯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릴없이 그런 질문을 내게 던졌다. 상심은 곧 깊은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어떤 위로나 조언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기 위해 가끔 방문하던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다. 항우울제 처방을 부탁하는 나에게 의사는 몇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병이 내게 찾아온 이유에는 분명 어떤 뜻이 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에는 어떤 섭리가 개입돼 있으며,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통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삶을 대하던 태도에서 오만하고 불성실한 면이 있었는지 돌아보십시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병에 걸린 일이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병원을 나섰다. 내가 걸린 병은 현대의학으로도 그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식생활, 흡연, 음주 여부와 같은 생활 습관과의 상관관계 역시 밝혀진 바가 없다. 유전적 소인과 더불어 타고난 몇 가지의 신체적 특성과 관련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 중에는 이 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 아마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조상 누군가에게서 온 특정 유전자가 내 몸에서 병을 예비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은 우연이지만, 그 유전자로 인해 내가 언젠가 병에 걸릴 것이라는 사실은 필연이었다.
내가 병에 걸린 이유에는 신의 섭리 혹은 형벌이 개입하지 않았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처럼 우연과 필연이 결합해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게다가 나는 딱히 운이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일찌감치 병을 발견한 것은 오히려 행운에 가까웠다. 날마다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죽어간다. 그들의 죽음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저 이 모든 일이 우연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뜻일 테다. 태풍이나 가뭄, 홍수와 해일, 빙하기처럼 자연 질서에 속한 일이다. 얼마 전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지진과 그에 따른 비극 역시 전 지구적 규모의 자연 현상이라는 관점에서는 우연일 뿐이다. 비탄과 슬픔, 인간이 흘리는 피와 눈물은 자연과 우주, 시간 앞에서 흔적도 없이 용해되어 버린다.
말본새 나쁜 그 의사가 말한 대로 질병은 내 삶을 반추하고 여생을 새롭게 계획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사건에 부여한 의미이며, 질병의 배후에는 어떤 뜻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병을 진단받은 뒤, 나는 일종의 결정론적 사고에 빠져있었다. 이 모든 일이 애초에 정해진 내 운명이 아닐까. 알게 모르게 저지른 나의 그릇된 행동이 병을 부른 게 아닐까 하는 마술적 사고가 나를 잠식했다. 나는 서서히 이런 불합리한 생각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내 병은 거의 악화하지 않았다. 병에 걸렸다는 면에서 나는 운 나쁜 사람이었으나, 병에 걸린 뒤에 나는 운 좋은 환자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훨씬 더 심각한 병을 진단받은 내 지인에게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에게 닥친 불행을 떠올릴 때면 나는 생의 아이러니와 부조리에 전율하고 또 슬퍼한다.
소설가이자 인문학자인 김운하는 한 작품 안에서 소설, 아포리즘, 문화비평, 수필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전작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작가의 경험과 허구가 결합한 소설이다. 뚜렷한 플롯과 서사 구조가 없는 이 소설은 때로 에세이와 문화비평의 양식을 빌어 파편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제주의 깊은 밤과 풍광을 배경으로 한 각각의 에피소드는 은둔과 그를 통한 자기 대면이라는 주제로 통합된다. 후술하겠지만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의 문학 형식은 글쓰기의 본질에 관한 그의 고민과 철학에서 비롯한다.
작가의 신작 『우연의 생』에서 김운하 작가는 우연과 인간의 운명, 예술, 사랑의 함수관계를 다룬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에세이, 문화비평, 아포리즘, 혹은 소설로도 읽힐 수 있겠다. “존재의 우연성, 벼락처럼, 섬광처럼 폐부를 찌르는 단어”에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이유는 어쩌면 작가가 경험한 비극적 사건에서 연유할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화가를 꿈꾸던 소년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처지에 놓인다. 성경에 나오는 욥처럼 작가는 신에게 인간의 운명에 관해 질문하며 비탄에 몸부림친다. 그러나 비극적 죽음 역시 우연에 불과하다. 상실에 대한 애도만이 인간의 몫으로 주어질 뿐이다.
우연한 사건은 또 다른 우연으로 이어진다. 어느 날 작가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작가가 속해 있던 세계였다. 붉은 석양을 등지고 환히 웃던 아이들의 모습. 훗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찬 엘리베이터를 마주한 순간처럼 작가의 운명을 뒤바꾼 장면이었다. 그 순간은 선형적이고 양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벗어나, 대체 불가능한 사건으로 이루어진 '카이로스'의 시간에 속해 있었다. 물론 그때의 작가는 그 사실을 알수 없었을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로 고착된다는 점에서 공간성을 획득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 년이 흐른 뒤 작가는 대학의 정문을 장식한 조형물 앞에 선다. 화가를 꿈꾸던 소년의 앞길에 또 다른 여러 우연이 겹친다. 80년대의 질곡 속에서 작가 역시 시대의 아픔에 휩쓸린다. “거의 스무 살이 되도록, 내가 삶과 세계 나 자신에 관해 백지 상태나 다름없이 무지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작가는 십여 년이 흐른 후,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지식과 앎으로 스스로 얼마나 교조적인 확신에 빠져있었던가”를 부끄러워하는 회의주의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빛과 그림자, 순수한 색채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에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다. 한 때, 사람들이 선망하던 “검은 양복을 입은 권력의 세계”에 속했던 일을 작가는 “실패와 어리석음”으로 규정한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로 들어찬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날, 작가는 "영혼의 낙마사고"를 겪는다.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오후였다. 작가는 그날 이후, 일터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선과 색, 조형 대신 언어라는 표상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를 선택한 작가는 인문학자이자 소설가로 독자 앞에 선다. 입지전적 이야기, 능력주의의 좋은 예로 소비될 법도 한 인생 역정을 작가는 ‘우연의 생’으로 규정한다. 그의 인생에 따른 “노력과 운의 기적 같은 결합” 역시 근본적으로는 우연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삶의 추는 능동과 수동의 양극 사이에서 진동하지만 삶은 근본적으로는 훨씬 더 수동태적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력해 역경에서 벗어난 이들이 빠지기 쉬운 오만인 '히브리스'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형벌을 부른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손에 넣은 성취 역시 종국적으로는 우연임을 인정하는 겸양만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
사랑에 빠지기, 글쓰기, 책 읽기 역시 우연이 빚어내는 마술이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대중가요는 노래하고 연인들은 이에 동조한다. 연인들을 사랑에 빠지게 한 신비하고 불가해한 과정을 설명하는 단어는 운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다른 일처럼 사랑 역시 몇 번의 우연이 중첩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와 토마시가 만나기 위해서는 여섯 번의 우연이 필요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테레사가 살던 도시에 급한 환자가 발생하고, 마침 그곳의 의사가 몸이 아파 진료할 수 없게 된다. 그를 대신해 불려온 토마시는 하필 테레사가 일하는 호텔에 묵는다.
토마시가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때, 마침 흘러나온 베토벤 음악은 ‘고상하고 교양있는 세계를 동경하던’ 테레사에게는 계시처럼 들렸다. “우리는 때로 기적 같은 우연의 일치를 맞닥뜨”리고 “그런 사건을 필연이나 운명의 징후로 읽곤” 한다. 이런 설정은 얼핏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에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허구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중첩된 우연은 현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내가 그때 이러이러한 일만 하지 않았어도, 그 장소만 찾지 않았어도....” 우연이 저지른 장난에 대해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흔히 늘어놓는 원망이 아닌가.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의 만남은 또 어떤가. 카프카가 블라우엔 슈테른 호텔에 찾아갔을 때, 마침 펠리체 바우어가 묵지 않았다면 문학사에 길이 남을 편지는 남지 않았을 것이며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깊이를 잃었을 것이다.
우연이 빚어내는 예측할 수 없고 불가해한 사건들 앞에서 때로 우리는 무력해지며, 삶은 무의미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필연적 연쇄”로 이어진 세계라면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결정론적 세계관, 기독교 신학은 세상에 일어나는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때로는 신의 섭리를 통해, 때로는 이성과 진보, 과학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우연은 인간 지성의 한계를 표현하는 단어”란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는 양자역학의 성립에 공헌하면서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런 비결정성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이미 “물리계에도 우연이 개입하여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확률적 인과율이 고전역학의 엄격한 결정론을 대체”함을 밝혔다.
작가는 세 장에 걸쳐 클리나멘이 지닌 신비에 관해 이야기한다. 기계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클리나멘의 힘은 혁명적이다. 고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설명한 것처럼 클리나멘은 ‘기울어 벗겨감 혹은 벗어남’을 뜻한다. 이 개념은 현대에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재해석되고 적용된다. 루이 알뛰세르는 클리나멘을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라 불렀다. 김운하는 클리나멘을 “주어진 운명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과학자와 철학자만이 클리나멘이 적용되는 장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영향의 불안』에서 작가들이 선배 작가들로부터 받는 영향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김운하는 그가 겪은 클리나멘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11월의 어느 날, 탈출하듯 도시를 빠져나온 작가는 ‘청주’라는 이정표에 이끌린다. 클리나멘이 가져온 ‘낯설게 보기’와 매료, 설렘과 흥분은 방황하던 작가에게 선물과도 같았다. 그때의 경험을 담은 작품은 아직 원고 상태로 남아있지만. 작가는 그 또한 인생의 아이러니라 여긴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만난 클리나멘 역시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마주쳤다. 공연장에서 연주를 반복하던 글렌 굴드는 공적인 삶에 지쳐버린다. 무작정 기차에 오른 그는 캐나다를 횡단하는 길고 고독한 여행길에 오른다. “고독으로의 클리나멘 운동.” 우연한 궤도 이탈이 가져온 우연, 곧 클리나멘은 글렌 굴드의 음악을 판이하게 바꿔놓는다. “오랜 고독과 성찰이 빚어낸 섬세하게 정적이면서도 듣는 이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아득히 감싸는 듯한 연주”는 고독과의 대면을 통해 탄생했다.
사랑과 더불어, 우연이란 신비가 가장 많이 개입하는 장은 예술이다. 쓰기, 읽기, 그리기, 춤추기, 연주하기, 어느 하나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소설 작법을 예로 들어보자.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플롯을 설정한 뒤, 등장인물의 성격을 설정한다.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주제에 맞게끔 유기적으로 배치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소설가는 없다. 섬광처럼 소설가의 머릿속에 찾아온 모티프가 발아한다. 그 모티프는 때로 누군가의 몸짓일 수도, 신문에서 발견한 어느 기사의 일부일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 결합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떠나보내기도 하며 새로운 유기체로 거듭난다.
글은 이제 작가를 더 깊은 사유로 인도해 작품의 골격을 보완하게 하고, 외피를 매끄럽게 손본다. 모든 예술가는 작품이 자기 손에서 떠나 독립성을 획득하는 것을 망연하게 바라본다. 작가의 신체는 그의 경험과 사유, 회상, 고통이 혼연일체가 되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장소다. “나 이전에 사건이, 익명적인 사건들이 선행하고 나는 그것을 인칭적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내 살과 영혼에 새겨진 상처 자체가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표현하도록 하기.” 김운하는 그의 글쓰기를 “우연의 글쓰기”로 명명한다.
문학 형식의 구분은 일종의 질서화 작업이며 작가의 창의력을 틀에 가둔다. 니체와 파스칼, 몽테뉴, 라 로슈코프, 키르케고르, 에밀 시오랑 역시 체계를 혐오했다. 새로운 형식에 대한 고민은 창작의 일부이기도 하다. 많은 예술가가 새로운 양식에 대해 고민해왔다.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형식의 심연』에서 “글을 쓰는 일은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방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미리 설정한 방법을 고수하면 글이 탄력성을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철자나 단어를 해체하고 재배열하고 다시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담은 단어를 창조하는” 애너그램이 그렇다. 특별한 줄거리가 없고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의식의 흐름’ 기법 역시 문학 형식에 대한 거부에서 탄생했다.
김운하는 모국어를 버리고 낯선 언어로 글쓰기를 택한 사무엘 베케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조지프 콘래드 같은 작가들을 “언어의 망명자”로 명명한다. “언어, 글쓰기의 클리나멘은 모국어로부터 이탈하는 방향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는 단어들, 문단들, 각 장들이 스스로 고정된 틀에서 미끄러져 나와 자유롭게 마주치고, 충돌하면서 그 틈바구니, 여백에서 자유로운 의미가 탄생하길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쓰기는 몽테뉴적인 하나의 시도Les essais이자 비틀거리며 방황하며 나아가는 탐구일 뿐이다. 나 자신의 삶 자체가 그러하듯이.”
김운하 작가는 에세이라는 장르가 본래 형식에서 벗어난 하나의 시도라는 점에 주목한다. 우연이 작용하는 장에서 “비틀거리며 방황하며 나아가는 탐구”라는 면에서 작가의 작품은 그의 삶을 닮았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글은 “자신의 생과 경험을 발판 삼고, 책들을 길잡이 삼고, 사유를 등불 삼아,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탐구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이다.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 역시 우연과 클리나멘이 개입한다. 감상이란 단지 수동적 행위가 아닐뿐더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행위이다. 독자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뿐 아니라 감상을 통해 작품이 지닌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독자의 내면세계는 감상을 통해 새롭고 충격적인 인식에 도달하기도 한다. 감상 역시 일종의 창조행위에 속한다.
철학에 대해 직접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작가들은 플롯과 은유, 서사를 통해 그 작업을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철학은 현학이란 누명을 벗고 작품 속에 녹아든다. 《우연의 생》을 통해 김운하가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 역시 철저히 문학의 화법을 따른다. 문장부호와 문장 간의 호흡, 문장을 배열하는 방식마저 작가의 심상을 드러낸다. 우연이란 주제 아래 유기적으로 엮인 45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어떤 장은 길고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목련” 같은 장처럼 시어로 구성된 짧은 장도 있다. 리듬과 고저, 장단이 작품을 관통하며 음악적 흐름을 부여한다.
첫 장에서 작가는 “운명이란 밀실”에서 길어올린 “본질적 장면”을 길어 올리며 시간의 경첩을 연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신화, 예술가의 삶, 철학의 역사에서 퍼 올린 우연과 운명,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양자 역학과 진화 생물학 등 현대과학이 발견한 우연의 힘은 그의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고대의 자연철학 용어인 클리나멘이 현대에 들어와 어떻게 적용되는지, 미세한 변화가 가져온 무질서, 엔트로피가 어떤 전복적 힘을 지녔는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오해와 착각”에서 비롯된 인간종의 히브리스가 집단적으로 발현될 때, 가져올 전지구적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우연과 노력의 기적 같은 결합이라며 작가는 자신이 빠져나온 절망에 관해 설명한다.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결국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다. 운 좋은 몇몇은 자신이 역경을 딛고 일어선 과정을 신화화하며, 오만한 인생론을 펼쳐 놓기도 한다. 물론 행운 역시 준비된 이들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오늘날 ‘준비된 우연 혹은 행운’을 의미하는” 단어 ‘세렌디피티’ 역시 ‘세렌디퍼’의 꾸준한 노력과 결합해 일어난다. 엑스레이나 페니실린의 발견 역시 세렌디피티에 해당한다. 김운하 작가는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세렌디피티로 보상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 역시 이야기한다. 숱한 자기개발서의 달콤한 이야기와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 선 작가는 두 번이나 세렌디피티와 마주한 경험이 있다. “인생을 순전한 운과 우연에만 기대어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주체성과 노력이 지닌 힘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 숱한 우연의 축복 혹은 재앙들, 우연과 더불어 아름답게 춤추고 싶었으나, 너무 자주 과잉된 격렬함 속에서 중심을 잃거나 혹은 잘못된 스텝을 밟으며 놓쳐버린 손길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작가는 생의 의미에 짓눌리지 않는다. “이제 생의 의미 따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생각한다.
"우연의 새들, 저 우연의 새들이 다가와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앉을 때마다, 자신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자아들이 깨어나고, 원자들의 우연한 클리나멘이 새로운 원자의 결합을 낳고 그것이 더 큰 새로운 무언가로 변형되듯 매번 자신의 자아가 변형되고 새로운 삶이 열린다....(중략).....생은 우연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니, 우연의 새들의 지저귐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
“세계는 우연과 필연의 기묘하고 역동적인 그것이 씨줄과 날줄로 꼬이고 짜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아름다운 문양의 태피스트리”라면, 김운하의 《우연의 생》은 깊은 사유와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을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짜낸 태피스트리라 부를 만하다. 김운하가 만든 태피스트리는 비단결처럼 매끈하지만은 않아 크고 작은 매듭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우리를 매듭 같은 문장 앞에 머물러 오래도록 사유하게 한다. 사고의 확장을 유도해 감상이라는 창조행위에 동참하게 한다.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고 사랑을, 절대적으로 사랑만을 요구하는 고유한 존재들이 있다. 생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생의 한가운데 있다. 지나간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추억하듯, 지금 이 순간을, 다가오는 매 순간들을 맞이할 날들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를 망각하지 않는 지혜에 대한 소망이 있다. 생 자체가 매혹적인, 유일무이한 한 편의 시가 되길 소망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있다."
김운하 작가는 소설가로 인문학자로 종횡무진해 왔으며 최근에는 오이코스 인문연구소 활동으로 더 바빠졌다. 작가가 천착해온 주제들은 《우연의 생》에서 더욱 심화하여 미학적 완결성을 획득한다. 작가가 다음 작품에서 보여줄 아름답고 신비한 태피스트리를 기대해본다. 태피스트리에 숨어있는 매듭에 우연히 걸려 넘어져 사유의 강물에 몸을 맡기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