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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브리맨
  • 필립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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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15
  • : 7,415
루페*로 들여다본 노년의 초상
-필립 로스 《에브리맨》

재와 다이아몬드

노년과 질병, 그에 따른 최종 부산물인 죽음을 다루는 필립 로스의 문장은 시종일관 담담하고 건조하다. 그의 펜촉은 메스처럼 예리하게 죽음을 앞둔 인간의 먹먹한 심리를 해부한다. 작가는 노년기에 막 접어든 시기에 이 소설을 썼는데, 서늘하게 벼려진 문장을 통해 노년이란 환부를 베고 가른다.
소설의 제목인 에브리맨은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을 뜻한다. 세월의 흐름과 노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단지 ‘그’로 불린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서 잠시 이 땅에 머무르다 스러져가는 우리 모두 같은 처지가 아닌가.
소설 속 인물들은 받아들이라는 말을 하릴없이 되뇐다. 받아들이기란 이 소설을 관통하는 깊은 울림이며,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겪는 많은 문제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수술을 앞둔 그를 걱정하는 딸 낸시에게 그가 건네던 이 말은 이번에는 낸시가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위로하는 말이 된다. 받아들이라는 말은 가혹하고도 유용한 삶의 해법으로 부모의 이혼으로 힘들어하던 낸시에게 아버지가 건네준 삶의 처방전이다. 낸시는 그 말을 통해 부모의 이혼과 그녀 자신의 이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극복한다. 불굴의 의지로 삶을 개척해온 소설 속 인물들-그의 아버지, 언론인 제럴드 크레이머, 그의 상사였던 클레런스-역시 죽음이라는 운명만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에브리맨은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보석상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가 판매하던 다이아몬드는 유한성에 예속된 인간과는 달리 이 땅에 영원히 남아있을 운명이다.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기이하고 부조리하다. 불멸이란 축복은 울고 웃고 사랑하며 이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에게가 아니라 무심하고 아름다운 돌덩이에 주어졌다. 세 번째 부인과의 사랑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덧없이 사라졌지만, 그녀의 목에 걸어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반짝인다. 그가 한 줌의 재로 돌아간 뒤 남은 어둠 속에서도.

육신을 위한 향연

죽음을 앞둔 환자로 전락했으나 한때 그는 잘나가는 뉴요커였다. 그는 태생적 유물론자로 일찌감치 랍비들이 늘어놓는 거짓말에 대해 꿰뚫어 본다. 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아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인 현실에 발붙이고 살기를 택한다. 그는 선지자가 약속하는 피안의 세계, 이데아와 관념의 늪에서 허우적대기를 거부한다. 그가 믿는 유일신은 감각의 세계에 임하며, 그 세계는 오직 육체로만 숭배할 수 있다. 주어진 세계에 대한 충만한 향유가 그가 믿는 종교의 교리다.
그가 지닌 인생관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문자로 작성한 자서전이 아니라 그가 그린 추상화에 이 제목을 명명하는 행위에서 그가 지닌 감각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에 탐닉하며 늘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대상만을 원한다.
아버지가 보석을 감정할 때 쓰던 루페를 통해 들여다보듯 그는 면밀하게 세상을 관찰한다. 보석이 투영하는 맑은 빛은 불멸의 세계에 속하지만, 그의 루페를 통과한 사물과 생명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생성한다. 그의 루페는 선악善惡이 아닌 미추美醜라는 잣대로 만물을 구분한다.
쾌락을 좇는 그의 본성은 만족스러웠던 두 번째 결혼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 정치적 공정함과 페미니즘이란 화두가 지배하는 요즘과 달리 그가 전성기를 보낸 80년대는 마초들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성적 일탈과 외도는 여전히 사회적 불명예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 요인이다. 그는 누구나 겪는 중년의 위기에 충동적으로 대응하며 젊은 여성이 지닌 “생물적 특성”에 그의 “생존 본능”을 내어주기 이른다. 그는 자신이 관습적이고 고지식한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사회적 “생존 본능”은 그가 지닌 더 원초적인 생존 본능인 육욕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의 인생은 죽음-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절대무無의 세계-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여정이다. 탈장 수술을 받기 위해 처음으로 입원했을 때, 옆 병상 소년이 사망한 사건은 어린 그에게 트라우마로 자리매김한다. 첫 수술을 받은 이후 60년 가까이 그가 누려온 수없이 많은 낮과 밤, 아침 식사와 입맞춤으로 점철된 시간은 죽은 소년의 눈앞에서 굳게 닫힌다. 이처럼 죽음은 한 인간 앞에 놓인 시간과 가능성, 무엇보다도 충만한 감각적 대상을 빼앗는 약탈자다.
그의 삼촌을 죽게 하고 그의 아버지마저 위험에 빠뜨렸던 복막염에서 회복됐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음 아주 가까이 다가섰다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그가 육체적으로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조차 죽음의 가능성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죽음이라는 큰 허무는 늘 파도처럼 우리를 덮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소년은 그의 무의식 속 평행 세계에 존재한다. 그가 속한 세계는 색채와 냄새, 빛과 그림자로 가득한 곳이지만, 소년은 암흑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1989년 관상동맥이 막혔을 때, 그는 소년과 자신의 상태가 역전되었음을 느낀다. “지금까지 긴 세월 동안 그는 살아 있었고 그 소년은 죽은 상태였다-그런데 이제 그가 그 소년이 된 것이다.”

소외된 육체

그 이후로 십 년 가까이 별 탈 없이 지냈으나 이제 그는 진정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내리막길의 경사는 점점 급격해진다. 필립 로스는 쇠퇴하고 시든 육체가 겪는 고통과 비애를 섬뜩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국부 마취 때 겪은 공황, 가슴 밖으로 불거진 제세동기, 팔뚝에 남아있는 정맥주사 바늘…….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각은 육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육체에서 소외되는 기이한 경험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신체를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무력감과 고립감, 수치심을 느끼며 점점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어간다.
“신체의 변화가 부끄러웠다. 남자의 힘이 줄어든 것이 부끄러웠다. 그를 비틀어버린 오류들과 그를 기형으로 만든 충격들-스스로 가한 것과 외부에서 온 것 모두-이 부끄러웠다. 밀레선트 크레이머가 겪는 축소의 과정에 무시무시한 웅장함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것과 비교되어 자신의 황량함이 아주 작아 보이게 만드는 것은 물론 그녀가 겪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중략)…이제 통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장결석으로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 소설 속 인물들이 경험한 이질감을 느꼈다. 왼쪽 등에서 퍼져나간 지독한 통증이 온몸으로 뻗어나갔고 통증에 밀려난 내 영혼은 몸 어느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 자신이 곧 통증이 된 것 같았다. 마약성 진통제가 혈관으로 들어가자 통증에 잠식되었던 내 몸은 서서히 온전한 내 것으로 돌아왔다.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그는 젊은 여성들에게서 관심을 거두지 못한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은 그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지만 땀에 젖은 젊은 육체와 그 육체가 그리는 곡선은 여전히 자극적이다. 해변에서 만난 여인을 유혹하는 행위로 그는 수컷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든다.
“그는 그렇게 말하다가 마치 열다섯 살짜리처럼 바지 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법에 걸린 듯 빠르게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그와 더불어 개체화가 이루어지는 숭고한 단독성이 확립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예기치 못한 발기는 “죽음과 다름없는 비인격화의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질병에 수반하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성적 흥분 역시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통제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성적 흥분 역시 이질감을 불러일으킬 법하다. 그러나 젊은 시절 분명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발기는 “숭고한 단독성”으로 승화한다. 이 활기찬 독립은 생명력과 남성성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의 반응 역시 호의적이지만 그녀는 연락해 오지 않았다. 이로써 “마지막으로 크게 한 방 터뜨려보겠다는 그의 갈망”은 꺾인다.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막바지에 선 사람들이 종종 그렇게 하듯 그는 지금껏 살아온 나날을 되돌아본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성장했고, 형 하위와는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 아버지의 보석상에서부터 다진 감각으로 자본주의의 꽃 광고업계에서 승승장구했다. 평생 많은 여자가 따르는 매력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쇄 남편”이라 씁쓸하게 자칭하듯, 세 번의 결혼생활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부인들과 자식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한마디로 그는 명암과 부침, 굴곡이 함께 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그가 가진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들인 로니와 랜디에게 그는 비열하고 무책임한 가장이었을 뿐이다. 원한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평가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한데, 그 대상이 부모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랜디와 로니는 “그의 가장 깊은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딸 낸시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느끼는 것과 달리 그 역시 아들들을 증오한다.
그러나 이제 그는 긴 저녁의 외로움 때문에 “사악한 새끼들, 삐지기만 잘하는 씨발놈들, 할 줄 아는 게 비난밖에 없는 이 조그만 똥 덩어리들”에게 전화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는 나약한 노인이다. 그들의 관계는 길고 구구절절한 애증, 피해자와 가해자가 역전되는 상황, 눈물과 용서, 회한과 한숨이 뒤섞여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가족관계가 거의 그렇다.
평생 흠모하던 하위와의 관계 역시 어긋난다. 하위가 지닌 건강과 생명력을 질투했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마음의 지옥에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두 아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격언은 개인사에도 적용된다. 개인이 발 디딘 현재는 이음새 없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구조물로 벽돌 몇 장 빼내어 그 성질을 바꿀 수는 없다. 지나간 세월 역시 앞으로 올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게 내가 한 짓이야! 나는 일흔하나야. 나는 이런 인간이 된 거야. 이게 내가 여기 오기까지 한 일이고, 더 할 말은 없어!”

화목한 가정의 기반이 되는 행복한 부부 관계 역시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이다. 개인이 타고난 기질, 두 남녀의 상성相性, 주변 환경의 영향이 어우러져 그 관계의 성격을 결정한다. 하위는 그와 달리 50년 가까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한다. 하위가 타고난 건강처럼 운이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삶의 모든 파악할 수 없는 우연을 스스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회한에 젖는다. 과거 그가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인생의 반을 발광 상태에서 살지 않으려” 내린 이혼이란 선택에 “사면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결혼을 감행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배우자를 선택한다. 부족한 자기인식 때문일 수도 있고 부주의함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그렇게 행동하지만, 그는 운이 나빴다. 첫 번째 결혼생활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만족스러웠던 두 번째 결혼생활 역시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중년의 위기와 권태로운 부부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외도였다. 그가 교활하고 계산적인 인물이라면 가정이 해체되는 위험은 무릅쓰지 않고 적당히 즐겼을 것이다. 두 번째 부인 피비는 남편의 외도를 눈감아줄 수는 있었으나 그의 거짓말을 용서하기에는 너무나 이상주의적이다.
“당신이 나에게 맡기고 나를 묶어놓으려는 그 역할을 견딜 수가 없어. 남편에게 거부당해 원한을 품고, 썩어빠진 질투심에 시달리는 애처로운 중년의 아내! 격분하고! 비위에 거슬리는 짓이나 하고! 아, 무엇보다도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이 싫어”
육체적 끌림만이 있었던 세 번째 부인과의 결혼은 어떻게도 변명할 수 없는 실수임이 곧 드러난다.

죽음을 앞둔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의 비극은 그저 운 나쁜 패를 집었기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늘 변명으로 일관하는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으로 행세했으나, 그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이혼하고 재혼했으며, 본능에 충실하다가 소중하게 일군 가정을 잃는다. 그의 딸 낸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그녀에게는 늘 다른 사람의 욕구가 우선한다.

그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루페의 렌즈는 왜곡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낸시는 그녀가 지니고 태어난 필터를 통해 사람들이 지닌 결점을 보정해 바라본다. 냉혹한 현실주의자는 따뜻한 이상주의자를 낳았다. 그는 딸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접는다. “낸시가 있는 그대로의 그를 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늘 너무 늦게 찾아오며 인생의 모든 비극이 여기 놓여 있다.

“엄마, 아빠, 하위, 피비, 낸시, 랜디, 로니……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만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말 안 들려? 다 끝났고, 나는 이제 당신들을 모두 다 떠나고 있어!”
그러나 그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감한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실수는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생을 산 죄로 외로운 노년을 맞이할 팔자를 타고난 것이다.

세 번의 장례식

소설에서 그는 세 번의 장례식에 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례식은 그의 부모를 보내는 자리였으며 세 번째 장례식은 그 자신을 위해 마련된다. 장례식이란 주인공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기이한 행사이자 산 사람을 위한 위로의 장이다. 그의 장례식 역시 다른 장례식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장례식에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를 추모한다. 하위와 낸시는 그를 훌륭한 아버지이자 자랑스러운 동생으로 기억한다. 낸시와 하위처럼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한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은 것은 딸 낸시와의 이별이다. 죽음은 감각의 차단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관계와의 단절을 뜻한다. 그는 “기적적으로 아직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인 딸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그는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사랑과 증오, 경멸과 연민, 동정과 의무감으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맺어왔다. 딸 낸시와의 관계만은 다른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순수한 사랑으로 구성되었다. 남아있는 나날 그를 위안하는 감정 역시 낸시와 나누는 애정이다.

두 번째 경동맥 수술을 앞두고 그는 부모의 묘지를 찾는다. 유골과 대화를 나누며 그는 그들의 선조인 뼈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그 뼈에 가능한 한 바짝 다가가 섰다. 그렇게 가까이 가면 그들과 연결이라도 될 것처럼, 미래를 잃은 데서 생겨난 고립감은 완화되고, 사라진 모든 것과 연결되기라도 할 것처럼.” 뼈들과의 연결은 그가 그의 부모, 더 나아가 그의 기원을 구성하는 뿌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는 계속해서 인부가 무덤을 파는 광경을 목격한다.* 손수 삽을 써서 수행하는 세심하고 꼼꼼한 작업을 보고 그는 감동한다. 새 무덤을 팔 자리를 표시하고, 거기 맞춰 흙을 잘라낸다. 떼를 틀에 맞게 잘라내고 무덤 뒤쪽에 보기 좋게 갖다 놓는다. 이 모든 작업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끔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마련한 2m 깊이의 구멍은 유족과 사자를 위한 보금자리다. 인부와의 대화를 통해 그는 그가 떠날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인류애에서 우러난 깊은 배려와 존중이 그와 함께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뼈들과 연결된 사슬의 한 고리가 되었으며 그런 방식으로 다음 세대의 뼈들과 연결될 것이다. 물론 개인의 고유성과 유한성을 유적類的 존재가 지닌 영속성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형대에 손을 맞잡은 죄수들처럼 잠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위로받는다.
수술실에서 일어난 심장마비로 그는 결국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간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한낮의 빛”이었는데 그것은 “눈에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그가 평생 루페로 들여다본 것은 “귀중하고 완벽한 행성”이었으며 그가 경험한 “십억, 조,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였다. 한 사람의 죽음과 더불어 이렇게 한 세계가 영원히 저물었다. 그가 들여다보던 루페의 렌즈 역시 그의 시야와 더불어 흐릿해진다.

*루페: 볼록렌즈를 사용한 작업용 확대경

*그는 무덤 파는 인부에게 죽은 이들 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
무덤 파는 인부가 묘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그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었죠. 일본에서 전쟁포로가 됐어요. 총각 때 부인 될 여자를 만나러 오곤 했던 시절부터 알았죠. "(본문 183-184p)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비교적 정확한 연대기로 제시된다. 그는 1933년생으로 71세에 죽었으니 소설 속 시간은 2004년 무렵이다. 무덤 파는 인부는 자신이 58세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1940년대 중반에 태어났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사람을 전쟁 전에 알고 지냈다기에는 너무 젊다. 혹시 인부가 초월자를 뜻하거나 묘지에서 나눈 대화가 그의 환상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작품이 지닌 주제 의식이 너무 달라진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도 맞지 않는다. 영어 원문을 찾아보고 고민이 해결됐다.
“the gravedigger points at a gravestone and explains that the man buried there fought in World WarⅡ, was a prisoner in japan. the gravedigger used to know him when the man came to visit his wife.”
2차대전에 돌아가신 분을 알고 지낸 게 아니라 2차대전에 참전했던 분을 알고 지냈던 것 같다. '총각때'란 말은 원문에 없고 문맥상 부인의 묘지에 들렀을 때부터 알고지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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