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즈음엔 한 작가가 마음에 들면 그의 책을 우르르 사들였다. 그중 한 사람이 트루먼 카포티인데, 내가 그의 책을 처음 만난 것은 [인 콜드 블러드]로 지금은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쓴 작가에 대해 수없이 감탄을 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뭔가 시니컬하고 독특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오드리헵번 주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썼다는 게 놀라웠다. 그래서 소설도 읽어보고 영화도 다시 봤는데, 영화와 소설은 결이 달랐고 어쩌면 작가는 이 영화에 만족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 그 느낌은 아니지. 그리고 나서 시공사에서 당시 출간된 책들을 사뒀었는데 그중 한 권이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이다. 그후로 또 다른 작가가 땡겨 그 작가를 읽었던지 남은 책들은 빛만 바래져 책장에서 10년도 넘게 자리만 차지했다 이번에 내 책장을 파먹어주는 북클럽 멤버들 덕분에 읽게 되었다.
초반에 읽을 때에는 트루먼 카포티의 수식어 중 하나인 '아름다운 문장'이 간헐적으로 느껴지는 것 외에는 [인 콜드 블러드] 만큼은 딱히 매력을 못 느끼며 읽었다. 아마 모호함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갈수록 그 모호함은 도가 지나쳐 삶과 죽음을 오가기까지 하는데, 곱씹을수록 그러한 단계들이 상징하는 바들이 추가되니 결국에는 역시나 이번에도 작가에게 감탄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장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트루먼 카포티가 1940년대에 젊은 나이로 인기를 쓴 소설가라는 사실이 이해가 되었다. 요즘 쓴 소설이라고 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문체에 독자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유동적일 표현들이 놀라웠다. 살아있을 때 부를 얻은 흔치 않은 소설가라더니, 좀 부럽구만.
[작가란 무엇인가3]에는 트루먼 카포티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거기서 만난 트루먼 카포티는 굉장히 쾌활해 보였다. 역시 스타성이 있는 작가였어! 인터뷰에는 작가의 쾌활함 뿐만 아니라 놀라운 내용이 있었다. 바로 이 소설은 자전소설이 아니라는 말! 첫 장편이기도 하고 주인공인 조엘의 처지가 어린 날 트루먼 카포티의 환경과 비슷해 당연히 자전적일 거라 생각했고 해설에도 그렇게 쓰인 듯 했는데 인터뷰에서 그는 그것을 부인했다. 오히려 [풀잎 하프]가 자전적이라고 했다. 다 읽었는데, 다시 읽어야 하나? 하지만 자전적이든 픽션이든 그런 것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의미가 있지는 않으니 차라리 다른 작품을 읽는 게 낫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소설을 남부고딕소설로 분류한다던데, 나는 그런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한 느낌보다는 열세 살 소년의 성장소설로만 읽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떠돌다가 알게 된 아버지의 거취,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작한 조엘의 성장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진실을 알게 되면서 실망한 후, 아버지의 대체자로서 랜돌프를 받아들이며 종국에는 성장을 이뤄내는 흐름으로 읽었다. 그 과정에서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동원해 다른 목소리와 다른 방을 경험하며 강해지고 성장하는 조엘의 모습이 괜히 기특했다. 음침한 면이 있어 혹시 애가 잘못되면 어쩌나 내심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도대체, 얘를 왜 부른거야?' 의문이 들었다. 조엘의 아버지를 총으로 쏘고 산송장같은 그를 돌본다고 해도 감추고 싶을 것 같은데, 속죄하듯 조엘을 부른 랜돌프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독서모임을 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조엘이 아버지의 역할을 랜돌프에게 기대했듯, 랜돌프 역시 조엘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우발적으로 조엘의 아버지인 샌섬씨를 총으로 쏘기 전까지 랜돌프는 이런저런 혼란을 많이 겪었던 사람이었고, 그러한 경험이 그에겐 또 하나의 성장이었을 터, 그것을 조엘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현실과 상상 그 어디쯤에서 조엘은 랜돌프를 따라 누군가가 지키는 다른 목소리, 다른 방에 들어가고 죽었다 살아나며 비로소 아버지도 랜돌프도 다 떨어내고 조엘 그 자신으로 서게 되었다. 다른 인물들이 경험한 죽음들을 통해서도 성장의 모습이 엿보여, 어쩌면 성장이란 하나의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누군가의 삶을 함께 경험하면서 다른 목소리와 다른 방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다 읽고 나서도,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뭔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모호함은 여전히 불편하다. 그러나 소설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읽을 때마다 다른 해석이 나오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언제나 남아 있는 것. 모임원들은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좋았다고 했지만 트루먼 카포티를 읽었다고 말하려면 그래도 한 작품만 읽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아닌가? 난 세 작품 읽었는데 여전히 트루먼 카포티를 읽었다고 말하기에 괜히 양심이 찔린다. 그게 트루먼 카포티의 매력이던가? 그럴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