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만 먹어도 살쪄요
  • 속죄
  • 이언 매큐언
  • 16,200원 (10%900)
  • 2023-02-28
  • : 8,680

엄마가 어릴 때 "네가 시골 살아서 그렇지 서울 살았으면 맨날 너 잡으러 다녔을 거다."라고 하셨는데, 살면 살수록 그 말이 내게 딱 맞다. 강력한 덕질 유전자를 보유한 지라 어디에든 빠지지 않으면 삶이 재미가 없다. 그렇게 중드에, 책에, 배구에, 야구에 빠지더니 지금은 쇼핑라방에 빠졌다. 빠지는 곳이 여럿이면 자연 한두 군데에는 소홀하기 마련인데 올해는 쇼핑라방과 중드에 좀더 치중한 삶을 살다보니 자연 책에 소홀하다. 올해 읽은 책이 30권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책에 관한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티가 난다. 하지만 사람이 늘 같은 모양으로 살면 무슨 재민가, 올해는 이런 모습으로 살기로 한다. 내가 원래 정신승리 영재다.


그렇다고 책을 멀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한 달 독서량이 반토막이 났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평균치에는 훨씬 웃돌고, 독서모임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다이어리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독서하는 습관은 여전하다. 다만, 그것에 대하여 묵히고 글로 푸는 일이 멈췄을 뿐이다. 그것에 대한 속죄의 마음으로 오늘은 이언 맥큐언의 [속죄]에 대해 쓰고자 한다.


매달 만나는 독서 모임에서 아주 감사하게도 우리집 책장 파먹기를 주제로 책을 선정하여 모임을 갖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난 달엔 밀란 쿤데라 책이 많다고 하자고 제안했는데 하필이면 없는 [농담]을 골라 당황했지만, 이달엔 이언 맥큐언의 [속죄], 다음달 엔 필립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책장 확인 후 선정했다. 현재 판매 중인 [속죄]는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있지만 내가 가진 책은 초판 17쇄본으로 2014년에 구매한 후 10년이 넘게 책기둥만 바래졌을 뿐 이번에 처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책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이사를 여러 번 다니면서도 책기둥이 허얘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책장에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는 게 갸륵했다. 그런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1부를 읽으면서, 나는 모든 인물에게 세심함을 발휘하는 작가를 느꼈다. 아마 읽는 나이에 따라 공감이 더 되고 덜 되는 정도가 다를 것 같은 건 읽는 사람의 사정일 뿐 작가는 모든 인물의 사정을 다 보듬어 지면을 할애했다. 브리오니의 정체성으로 대변되는 '글쓰기'에 대해 서술한 많은 문장들을 읽으며 이언 맥큐언 자신이 소설이라는 장르에 가지는 애정과 책무에 대해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버지니아의 [파도]를 언급한 부분에서 이런 나의 인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의 작곡가가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쓸 수 없듯이 현대의 소설가는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토대로 하는 소설을 쓸 수 없다. 지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생각과 인식 그리고 마음이었다. ---(중략)---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를 세 번이나 읽은 그녀는 인간 본성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종류의 소설만이 그 변화의 본질을 잡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그 흐름을 읽어낼 수 잇따면, 그리고 그 흐름을 균형 잡힌 구도 속에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사에 길이 빛날 없적이 될 것이다. (394쪽)


이 소설의 화자인 브리오니는 자신이 철없이 저지른 막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이야기를 새로 짓는다. 하지만 속죄가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속죄하기 위해 노력한 브리오니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당연하지만 많이 잊고 사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속죄를 한다며 결국은 자기 마음 편하자는 행동을 하고는 한다. 애시당초 속죄는 가능하지 않은데, 용서를 구하는 제스처로 속죄의 시늉만 하려고 한다. 브리오니는 어떠한가? 그녀 역시 언니 세실리아와 연인 로비의 인생을 구덩이에 몰아넣은 죄를 글의 형식을 빌려 속죄의 시늉만 한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50여 년을 마음 속에 죄책감을 갖고 살아온 브리오니의 태도만큼은 시늉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그녀의 속죄 노력에 대해서는 폄훼하지 못하겠다. 악마같았던 소녀 시절이었지만 그 꼬마 악마를 그냥 두고 본 어른 악마들에 비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나는 브리오니 만큼은 커녕 발끝도 못 따라갔을 것이다.


소설가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진실을 말할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일단 그렇게 쓸 수 있다. 음악가는 음악가대로 화가는 화가대로, 가수는 가수대로 그럴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을, 만약 속죄의 노력을 해야한다면 어떤 방법을 취할 수 있을까? 나 역시 글일 지도 모르겠지만 브리오니만큼 솔직하게는 어려울 것 같다. 문득, 에세이를 투고할 때 받은 피드백이 떠오른다. 에세이는 자기 이야기가 더 드러나야한다는 말. 아마 대단한 작가들은 그 과정을 한 번은 거쳐야 그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을 터이고 이언 맥큐언이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건 그 역시 그 과정을 분명 겪었을 거라 짐작하게 한다.


[속죄]는 속죄의 가능 여부부터, 작가의 소명,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서처럼 아픈 시대 안에서 더 처참해지는 개인의 운명까지 느끼게 했다. 영화 <어톤먼트>를 아직 보진 못했지만 모임의 구성원들이 모두 영화도 영화대로 좋다는 평가에 도리어 잠시 미뤄두게 된다. 이렇게 글을 뱉고 좀더 소설을 내 안에서 묵힌 다음에 영화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마음의 죄를 지니고 산 브리오니와 마음의 죄를 무시하고 산 롤라와 폴, 누구의 삶이 더 행복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롤라와 폴일 것이다. 나도 아마 그들처럼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브리오니는 이언 맥큐언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 그들은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소설가라는 것, 그들이 쓴 소설이 이토록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깨닫는다.

책을 읽으며 초반에 인물 관계도를 그려달라고 AI에게 부탁했다. 초반에 그린 것이라 추후에 추가된 관계에 대해서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도리어 그것이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에 공유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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