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fragment
  •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 윌리엄 해즐릿
  • 15,030원 (10%830)
  • 2025-02-07
  • : 4,420





아티초크 출판사에서 지난 8월에 처음 국내에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를 선보이고 수개월 뒤, 우연히 읽게 된 브리드라는 잡지에서 해즐릿에 대한 짧은 소개를 마주쳤다. 이토록 유명한 작가인데, 한국에 본격적으로 한 권의 책으로 소개된 건 겨우 작년에 불과하다니. 그런 에세이스트 해즐릿의 두 번째의 에세이,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가 출간되었다.


공화주의자 해즐릿

해즐릿만의 논리와 문체는 여전히 강렬하고 신랄하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서 보여주었던 모두 까기에 이어, 「패션에 관하여」에서는 겉만 화려할 뿐, 정신은 공허한 유한계급의 '패션'과 거짓 우월성만을 쉽게 모방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뒤를 이어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에서는 타인의 권력을 숭배하며 아첨하는 이와 권력에 집착하는 독재자를 겨냥한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서 보여주었던 한결같은 신랄함과 대조되는 몇 편의 에세이도 있었다.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는 삶과 인간에 대한 해즐릿의 따뜻한 시선이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에세이도 있었는데, 「미술가의 노년에 관하여」에서는 노년을 맞이한 베테랑 예술가를 온화하게 바라보고,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에서는 우리들의 인생을 긍정해 준다. 공화주의란 '모두의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공적 이익과 공동체의 안녕을 중요시하며 각각의 개성은 귀족이나 평민 등으로 다를 수도 있으나 공동체의 입장에서 모두 공화적 개념인 국민이나 시민의 미덕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정치철학'을 말한다. 공화주의자 해즐릿이 한결같이 비판하는 대상은 적어도 모든 인간들은 아니었다. 해즐릿은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내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은 가면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바로 다음 문장에 '가면 뒤에 숨은 사람에게도 인간다운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고 하며 한발 물러나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에는 유예를 두는데, 사실 해즐릿은 그 누구보다도 삶과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

요즘 시대에 필요한 해즐릿의 애티튜드

자본주의가 후퇴하기는커녕 점점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해즐릿의 태도가 필요하다.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를 읽으며 누군가가, 또는 최근의 상황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지금보다 더 부당하고 잔인한 처우를 당할 수 있었을 시기에 해즐릿은 펜촉을 권력가에게 겨눴다. 이런 글 솜씨라면 해즐릿은 어용학자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안녕과 이익보다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화주의라는 신념 하나만을 고집했기에,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에세이스트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논리나 삶처럼 우리들에게도 돈이 아무리 중요한들 결코 꺾이지 말아야 할 모두를 위한 신념이 필요하다.

당대 최고의 에세이스트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의 주장에 맞춰 전개되는 논리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의 빛을 따라가며 글을 쓴다는 것이 궁금하다면 해즐릿의 에세이가 좋은 예가 되어줄 것이다.






+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를 읽으며 또 한 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린다.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눈에 보이는 물체보다 소리와 냄새, 때로는 맛이 더 오래 기억에 남고 어쩌면 연상의 사슬에 더 좋은 고리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해즐릿의 문장이 어쩌면 그 유명한 맛과 향기로 과거의 추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프루스트 효과'의 탄생에 영향을 준 건 아닌지. 또 해즐릿이 저 너머에 있을 흥미로운 것들에 대한 기대를 품는 우리들의 모습을 표현한 부분을 읽으면서, 프루스트가 이름과 고유명사에 대한 몽상을 했다던 주석의 설명이 동시에 떠오른다. 프루스트가 해즐릿에 영향받았다던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니 이러한 주장은 나의 공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이다.



시간은 고통의 침을 뽑아 준다. 슬픔을 생각과 격정의 보존액에 계속 담금질하면 그 본질이 변형된다. 원래 가졌던 인상은 우리가 소망을 투영했다는 흔적만을 남긴다.- P57
지극히 보잘 것 없던 일들도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먼 관점에서 뒤돌아보면 회상에 회상을 거듭하면서 확대되고 풍요로워지며 급기야 흥미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지독했던 고통도 시간에 의해 부서져 결국 가라앉는다.- P59
우리는 황량한 허무보다는 수많은 희망과 두려움으로 동요되고, 가지각색의 기쁨과 슬픔으로 다채로우며, 움직임이 있고 번잡한 이 삶이라는 풍경에 더 많은 흥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무어라도 된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낫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흥미를 가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P88
인간의 마음은 어딘가 기댈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부심이나 즐거움의 근원에 접근하지 못하면 인간의 마음은 고통과 사랑에 빠지고 압제에 매혹된다. 그 마음은 부와 권력의 무정한 손아귀가 앗아간 자유와 행복, 안락과 지식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고 가난한 채무자는 권력자가 과시하는 모습을 질시와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P157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