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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크게 가리는 것 없이 책을 읽고 있지만, 어릴 적에는 만화책 아니면 오로지 흥미 본위의 오락 소설만 읽었다. J.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로 환상 문학에 눈을 떴고, 이우혁 작가의 퇴마록으로 공포 소설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만화풍 그림 표지에 삽화도 있는 라이트노벨도 읽었다. 사건이 명확하고, 질문을 던지지 않고, 누군가 감상을 물어본다면 "재미있었다" 외에는 별달리 할 말이 없는 책들에 나는 더 익숙했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며, 어릴 때에는 잘만 읽었던 '소설'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읽었던 소설과 지금 읽는 소설이 많이 달라진 탓도 있겠지만, 국어 수업 시간에 어떤 식으로 문학을 접했었는지 생각해 보니 그 이유는 쉽게 떠오른다. 나는 때로 모호하거나 난해한 소설들을 접하며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누군가 하나의 명확한 답을 내려주기를 원했다. 마치 국어 수업 시간에서 문학을 접했던 것처럼. 한동안 내가 평론가의 글이나 영상을 열심히 찾아보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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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지프 엡스타인의 에세이, 『소설이 하는 일』은 '소설'이라는 문학의 한 갈래에 대해 깊게 파고든다. 저자는 오랜 기간 소설을 읽고, 소설과 관련된 강의도 하며 그렇게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을 총 18개의 주제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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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고 묵은 고민, 소설을 읽을 때의 고민에 대해 좋은 답이 되어줄 것 같아 집어 들었다.
소설의 행간에서 무언가 느끼려면,
우리는 어떤 것들을 확인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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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권의 에세이는 '소설 읽기'에 대한 하나의 강의를 듣는듯한 느낌을 준다. 책은 '소설 읽기'를 통해 우리가 변화하는 방식을 짚어주고, 때로는 우리가 이 형식에 너무도 익숙해 무감각해져버린 소설의 요소들 ─ 등장인물, 플롯, 심리, 사건 등 ─ 을 다루며 독자에게 '소설 읽기'의 감각을 새롭게 불어넣어 준다.
저자가 왜 3인칭이 아닌 1인칭 시점을 선택했는지, 왜 몇몇 중요한 장면을 더 극화하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어떤 장소에서는 복선을 만들고 또 다른 장소에서는 그러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소설의 초반부와 후반부에서 등장인물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행간을 읽어나가며 달라지지는 않았는가.
저자는 인생의 여러 단계마다 우리는 소설에서 늘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하면서 하나의 소설을 다른 나이에 다시 읽는 즐거움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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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거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닌, 우리들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바로 소설이다. 하지만 16세기부터 등장한 대량 인쇄술로 시작한 소설이라는 형식은 지금 우리에게 너무도 무감각해지고 익숙한 형식이 되어버렸다. 하나의 답만 정해진 국영수만 좇다 보니 잊고 살지 않았나, 사람들로 구성된 우리의 세상은 굉장히 미묘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이러한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잘 쓰인 한 권의 소설이다. 굳이 '소설 읽기'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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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책 읽기에 대해 쓴 많은 작가들은 '고전 읽기'를 강조한다. 때론 오락 본위의 소설들을 읽는 것을 허튼짓처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기성세대 독서인들이 '고전 읽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오락 본위의 소설 속에서 한참을 빠져있는 독자들은 늘 존재하지 않는가. 어린 나이일수록 특히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저자 역시 어릴 때는 힘 안 들이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선호했다고 한다. 서두에서 말했듯 나 역시 고전은 전혀 읽지 않았다.
23쪽에서 저자는 소설에도 영화처럼 읽기에 적절한 나이를 나타내는 등급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고전에서 서술되는 미묘한 심리나 사회상, 철학적 메시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우리가 아직 충분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텍스트에 불과하다.
기성세대가 오락 본위의 소설들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도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세상에 등장해 버린 것들을 다시 추방하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는 오락 본위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다.
그렇게 독자들이 텍스트 읽기를 즐기다가 어느 날 진지한 소설을, 아주 모호하고, 아주 혼란스럽고, 아주 어려운 그런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면 이 책이 하나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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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부적절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번역 속에서도,
가넷만큼의 러시아어에 대한 깊은 지식 없이도 러시아 대문호들의 위대함은 드러났다.
그리고 품질이 낮은 번역 속에서도 그 위대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면
그 대상은 위대한 소설가라는 정의일 수도 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했다.
─ P.87
책 번역의 질적인 문제는 늘 존재한다.
이 책도 솔직히 말해 번역이 아쉽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기도 하고,
주어는 있는데 긴 인용구 때문에 문장을 마무리하는
서술어가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자주 보였다.
번역이 아쉬워 책을 덮기도 했고,
번역이 아쉽다는 후기에 내려놓는 독자도 봤다.
낮은 품질의 번역이어도 내용이 괜찮다면 상관없을까?
좋은 책,
하지만 번역 품질이 중요한 독자에게는 권하기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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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소설이 제공하는 지식은 열거할 수 있는 지식도,
엄격한 시험을 전제할 수 있는 지식도 아니다.
덜 제한적이고 더 넓고 더 깊은 소설의 주제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이며,
아주 각양각색으로,
가끔 혼란스러우면서 겸허한 형태를 갖춘다.
훌륭한 소설을 읽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교육에 관한 최고의 정의와 궤를 같이한다.- P31
정치적 올바름이 문화에 대해 제멋대로 질주하게 계속 놔두면, 정치적 올바름은 소설의 비평, 더 나아가 다른 문화 분야나 교육 분야에서 의견이 다른 비평을 파괴하기도 한다. 남성이 어떻게 여성이 쓴 소설을 비평하는 게, 백인이 어떻게 흑인이 쓴 소설을 비평하는 게, 이성애자가 어떻게 동성애자가 쓴 소설을 비평하는 게 가능할까?- P146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슈라이버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훨씬 더 미묘하다.
더 애매모호하고 더 우회적이다.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약간 어려워야 한다.
단, 메시지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메시지는 대개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이다."-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