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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수업 중에 '짜증 난다'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한다고 이야기했다. '짜증' 속에는 다양한 감정이 뭉뚱그려져 있기 때문에, 내 안의 다채로운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최근 한국의 부모 사이에서는 아이에게 다양한 감정의 표현을 교육하는 육아 활동이 대세이기도 하다.
나, 너, 우리,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은 마치 포토샵의 색상 피커처럼 참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동안 내 마음을 얼마나 온전하게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는지 곱씹어 보면 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 색의 삼원색처럼 단순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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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고,
다른 누군가는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여 표현하고자 한다.
2009년, 존 케닉은 불완전한 언어의 빈틈을 메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직 이름 없는 감정들에 하나하나 이름 붙여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나라는 개인은 찰나의 순간에 느낀 모호했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도, 아니 되려 인식조차 하지도 못했었는데 저자의 생각과 그에 대한 집요함에 마침내 온전한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서는 윌북 출판사를 통해 『슬픔에 이름 붙이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제롬 케이건은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라는 책에서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독자에게 첫 질문을 던진다. 물론 '모든 것'을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게 그 장에서의 주된 골자였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반증하듯이, 존 케닉은 세상의 언어들을 최대한으로 끌어와 조합해 모호한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 Mamihalpinatapai라는 단어가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 있는데, 그 단어처럼 어느 나라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이지만 다소 복잡한 무언가에 대한 것을 한 데 모아 엮은 책인 줄 알았는데 직접 만든 단어들이라고 한다. (※mamihlapinatapai: (명)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굳이 스스로 하고 싶지는 않은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자원하여 해 주기를 바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면서도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
책의 부제인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이라는 문장답게 대부분의 텍스트들이 단어와 뜻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어의 뜻을 확인하기 위하여 종이 사전들을 재빠르게 손으로 뒤적거렸던 때가 떠오르지만, 그때와는 달리 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오래 음미하게 된다.
모호한 감정들은 텍스트화되어 우리는 이런 감정도 있음을, 있었음을 인식하고, 지나간 세월을 반추해 본다.
나 역시 이 감정을 살면서 한 번쯤 느껴보지 않았던가, 하고.
일부 감정 단어에는 저자가 애정을 담아 쓴 글이 있는데, 스스로와 우리네 삶에 대한 글이라 그런지 나에 대입해 깊게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이 그저 단어와 뜻만 있었더라면 분명 아쉬웠을 텐데, 이렇게 중간중간 삽입된 에세이가 책을 더 풍성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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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을 만들어내는 순간 실재는 방을 떠나고 만다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이 떠오르지만,
그래도 확인받고 싶고 복잡한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건 사람의 본성일까?
아니면 나만의 집착일까?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기에는 좋다 말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이 책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고 싶고, 내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함께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그런 대담(對談)을 말이다. 또, 오래 곁에 두다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다가 언젠가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을 이 책으로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 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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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평단으로 받아봤던 책이었지만, 좋아서 굳이 다시 사는 수고를 한 책.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도 너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