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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젊은이들이여,
내가 어떻게 여러분을 고독으로 이끌 수 있겠습니까?
운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듯
고독 역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헤르만 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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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출신의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조르다노의 데뷔작 『소수의 고독』이 감각적인 표지로 새롭게 재출간되었다. 『소수의 고독』은 소수[素數]라는 수학적 개념을 통해 고독할 운명을 지닌 이들의 서사를 그려낸다. 어린 날 사소한 실수 하나 때문에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두 남녀, 알리체와 마티아가 등장한다.
알리체는 스키를 타던 중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가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영원히 절뚝거리게 되었다.
마티아는 친구의 생일파티에 발달장애를 가진 쌍둥이 동생 미켈라까지 데리고 가기 싫었다.
미켈라를 잠깐 공원에 두고 다녀오자, 마티아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게 미켈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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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죄책감, 트라우마
자해하는 우리들
알리체와 마티아의 실수는 너무도 사소했고, 결과는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겨우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뿐인데, 잠깐 공원에 두고 갔을 뿐인데. 그래서 더욱 비참한 운명이리라. 겉으로는 평범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그들이 지닌 고통은 자신을 해하는 형태로 종종 등장한다. 알리체는 만성적인 식이장애를 겪고 있고, 몸에 타투를 새긴다. 마티아는 자신의 두 손을 칼로 긋거나 불에 그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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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두는 또 다른 삶을 원해요.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아니 거의 없고…
다른 삶을 원할 뿐이죠.
─ 『죽음의 격』 中
『죽음의 격』이라는 책에서는 정신적인 문제로 안락사를 원하는 이들에 대한 이런 설명이 있다. 몸이 아니라 마음에 문제가 생겨서 죽고 싶은 이들은 사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다른 삶을 원할 뿐이라고. 자해의 이유는 저마다 다른 듯하면서도 서로 닮아있다. '다른 삶'을 원하는 우리들. 문신을 새기면 지금의 나와는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몸에 상처를 내면,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발적으로 몸에 차이를 만들어내며 알리체와 마티아는 그런 희망을 품은 게 아니었나. 다리를 절지 않아도 됐을 나, 미켈라를 잃어버리지 않은 나로 되고 싶은 그런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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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끝엔 결국 고독해지는 운명이
서로의 운명을 알아보며 알리체와 마티아는 잠깐 가까워지지만 끝내 다시 멀어지는 선택을 한다. 행간을 읽으며 이러한 흐름이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내심 조금은 다른, 의외의 결말을 기대했었다. 마티아도 알리체도 이제 그만 행복해지면 안됐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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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素數)는 오직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진다.
소수는 의심 많고 고독한 수다.
어느 때는 소수 역시 다른 평범한 수들처럼 되고 싶었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그럴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P.173
소수는 나누어져도 1과 자기 자신으로밖에 될 수 없다. 소수를 억지로 나누어버리면 숫자는 깨져버린다. 마티아는 그걸 알고 있기에 알리체를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으리라. 125쪽에서 마티아는 교과서는 우리가 해할 일이 전혀 없어서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수학적 난제는 여러 번 부딪히고, 풀어도 다치지 않는다. c.v.d.로 결론짓더라도 서로 후련할 뿐, 두 번 다시 마주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결론이 났다'라는 말은...
"정말 공부가 그렇게 좋아?"
마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거니까." 마티아는 짧게 대답했다.
공부는 혼자 할 수 있고,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이미 죽어서 싸늘해진 데다 곱씹을 수 있어 좋다고 그는 알리체에게 말하고 싶었다. 교과서의 모든 페이지가 똑같은 온도를 지녔다는 것, 그것들은 우리가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것, 그리고 전혀 해롭지 않고 우리도 그것들을 해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 P125
소수(素數)는 오직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진다. 소수는 모든 수가 그렇듯 두 개의 수 사이에서 짓눌린 채, 무한히 연속하는 자연수 안에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다른 수보다 한 발 더 앞서 있다. 소수는 의심 많고 고독한 수다. 그 때문에 마티아는 소수에서 경이를 느끼곤 했다. 때로는 소수들이 실수로 그런 수열에 놓여, 목걸이에 꿰인 진주들처럼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는 소수 역시 다른 평범한 수들처럼 되고 싶었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그럴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P173
대학 1학년 때 마티아는 소수 가운데 좀 더 특별한 수가 있다는 걸 배웠다. 수학자들은 그들을 ‘쌍둥이 소수‘라고 부른다. 쌍둥이 소수는 근접한, 거의 근접한 두 수가 한 쌍을 이루는데, 그 사이엔 항상 둘의 만남을 방해하는 짝수가 있다. 11과 13이라든가 17과 19, 또는 41과 43 같은 수들이 그렇다. 인내심 있게 계속 세어나가면, 이 쌍둥이 소수들이 점점 희소해지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오직 기호로만 이루어진 고요하고 규칙적인 세계에서 길을 잃은 채 더욱 고립된 소수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만난 쌍둥이 소수들은 우연의 산물이며, 결국 그들의 진정한 운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더 세어볼 마음이 들지 않아 그만두려는 찰나 서로 꼭 붙어 있는 한 쌍의 쌍둥이 소수를 만나게 된다. 수학자들 사이에선 계속 수를 헤아리다보면 언제나 다음 쌍둥이 소수가 나타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비록 발견될 때까진 어디에 위치하는지 단언할 수 없지만.- P174
어떠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정확한 경계는 뭘까.- P192
그들이 거쳐온 길은 공통적이었다.
머리 전체를 물속 깊숙이 집어넣었다가 바닥을 치고 나서야 수면 위로 올라와 겨우 숨 쉴 수 있게 되는 그런 길.- P223
부모님의 애정은 수요일마다 전화로 늘어놓는 끼니나 더위, 추위, 피로, 때로는 돈에 대한 걱정들과 작은 배려로 귀결되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 놓여 있었다. 한 번도 대면하지 않은 주제들, 주고받아야 할 사과와 용서 그리고 바로잡아야 할 기억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 응어리 속에.- P374
잃은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만 서리가 내려 얼어붙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