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비슷한 것>은 <라쇼몽>에서 이야기가 멈춘다. 무척 아쉽다..

어쨌건 어린시절 이야기에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던 형에 대한 이야기. (영화와 문학에 대한 모든 영향을 형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서른을 넘어서는 살지 않겠다고 말한 형님은 실제로 28살에 자살을 해버린다. 이 형님은 가히 천재적으로 영리한 사람이었고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이상한 경험들을 어린 시절에 많이 심어주신 분이다.... )형님의 시체를 수습해 돌아가는 길에 시신이 신음 소리를 냈다는 장면(시체에 공기가 있던 것이 접혀 있던 다리에 눌리면서 그랬던 모양.)이나, 영화사 P.C.L에 들어가게 된 계기, 그 이후 도호에서 만든 영화에 대한 술회와 파업과 그로 인해 생겼던 피로와 괴로움, 자신의 페르소나라 할 만한 배우 미후네 도로시에 대한 서술 등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지점은 구로사와 기본적으로는 문학과 회화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점이다. <요짐보>의 원작은 대실 헤밋의 <붉은 수확>이었으며, <천국과 지옥>은 에드 멕베인의 <왕의 몸값>이라는 작품이 바탕이 되었다고. 대실 헤밋은 <단편집>과 <몰타의 매>를 읽었는데, 대실 헤밋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적인 감각을 떠올릴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들개>의 시나리오를 쓸 때는 먼저 소설 형식으로 서술을 했다고 하는데, 조르주 심농을 좋아하서 심농풍의 사회 범죄 소설을 먼저 썼다고 한다. 소설풍으로 먼저 쓴 덕에 시나리와 영화에 대한 재인식을 할 수 있었다고도 적고 있고.. <란>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월등히 뛰어넘으며,,,, <라쇼몽>이야 다들 아다시피 아쿠다카와의 <덤불속>과 <라쇼몽>을 합쳐서 만든 이야기. <라쇼몽>에서 나오는 그 거대한 라쇼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렇게 크게 지을 생각이 없었는데 교토에 불러 놓고 다이에이 기획사가 좀 기다리게 하는 바람에 이미지가 그렇게 커졌다고...영화를 보면서 세트 크기랑 비오는 장면은 대체 어떻게 찍었나 싶었는데 예상대로 엄청난 소방차의 도움과 촬영소 소화전을 총동원...책에 그 세트가 지어지는 사진들도 있다..중간 중간 첨부된 사진들이 있어서 좋다.... (94년에 민음사에서 <감독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동일한 책은 영어중역에 이런 사진들도 없어서인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천국과 지옥>은 얼마 전 영상자료원에서 보다가 정말 놀랐다.... 자수성가한 주인공 곤도의
아들이라 착각해 운전수의 아들이 대신 납치가 되고 돈을 건네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하는 1부는 곤도의 집이라는 좁은 공간만 나오는데, 돈을 주기로 결정하는데 까지 에너지는 굉장히 뜨겁다. 돈을 건네는 열차를 기점으로,,(으으 정말 군더더기가 없다..)해서 2부로 이야기가 전환되는데 2부는 범인을 찾기 위한 형사들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여기서부터 공간이 갑자기 확 펼쳐지지만 에너지는 차갑고 지적으로 바뀐다. 이십 여명이 되는 형사들이 모여서 경과보고하는 장면에서의 에너지 전환 장면에서는 정말 놀랍다. 마지막에 범인과 곤도의 짧은 대화를 통해 천국과 지옥이 어디인지를 관객에게 생각하도록 만들고는 이야기가 끝나는데, 이건 뭐 더 할말이 없을 정도....다. (영화를 보던날 영상자료원이 무척 더워서 불쾌한 상태로 영화를 봐야만 했다...극기훈련을 하는 기분으로 더위를 참으면서 영화를 보다가 영화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튀어나갔다. 휴;;)
- 체크해 둔 페이지 중
"15년 혹은 조금 더 이전의 일이다. 어떤 젊은 감독이 무슨 자리에서,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어서 죽어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더 나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나중에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게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말수 적은 나루세 씨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미조구치 겐지 감독, 오즈 야스지로 감독, 그리고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 죽고 일본 영화계가 기울었을 때, 너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과연 그 빈자리를 채웠는가?...내가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세상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남에게 의존하는 나약하고 썩은 정신은 모든 것을 망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 짱구야!"
"그 길을 오갈 때 늘 책을 읽으면서 걸었다. 히구치 이치요, 구니키다 돗포, 나쓰메 소세키, 두르게네프도 그 길에서 읽었다. 형 책, 누나 책, 내가 산 책을 가리지 않고 이해하거나 말거나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닥치는 대로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는 닥치는 대로 했던 거 같다. 책 읽기, 영화 찍기, 시나리오 쓰기.... 그의 영화들은 그가 닥치는 대로 살다가 남긴 결정체들이다. 그 결정체들은 시간이 지나도 별처럼 반짝거린다. 모든 별들이 어떤 에너지와 힘의 결과인 것처럼, 예술의 결과물들도 비슷한 것 같다. 너무 뜨거우면 금세 폭발해 사라져버리고 너무 차가우면 빛나지 못한다. 빛나기 위해서는 뜨겁되 차가워야 한다...
다음은 이 자서전의 첫 부분.. 읽자마자 매료됐다.
"나는 알몸으로 대야에 들어가 있었다. 좀 어두컴컴한 곳이었는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대야 가장자리를 잡고 흔들고 있었다. 대야는 경사진 낮은 마룻바닥 한가운데서 뒤뚱뒤뚱 흔들리면서 찰랑찰랑 물소리를 냈다. 아마 그게 재미있었나 보다. 더 열심히 대야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홀라당 뒤집혔다."
아, 이 아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