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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민감하다는 것, 공감한다는 것은 단지 규칙을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행동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지?” 라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생기려면, 타인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야 하는데, 이는 사실 진정한 감수성이나 공감과는 양립할 수 없다. 진정한 감수성이나 공감에는 규칙이 들어설 틈이 없다. 숙고를 위한 자리도 없다. 그러므로 규칙을 무의식적으로 재빨리 적용할 틈 따윈 더더욱 없다.”(뇌과학의 함정, 173)

 

알바 노에의 책 <뇌과학의 함정>을 읽으면서 비트겐슈타인 생각이 많이 났다. 알바 노에의 책에도 몇 번 인용되기도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인지과학과 다시 만나니 흥미롭다. 알바 노에가 다루는 이야기들은 주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과 만나는데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기에 이제까지의 철학의 문제는 언어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빚어졌다. 언어가 실재를 지시한다는 착각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이 마치 실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기에 언어란 실재를 지시하지도 않으며, 명확한 문법이나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것처럼 언어놀이는 실제로 행해지면서 규칙이나 규범이 드러난다. 즉, 아이들은 규범을 배우는 게 아니라 놀이에 참여하면서 규칙을 발견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삶의 규칙이라 할 만한 관습이나 규범, 제도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바뀌고 없어지기도 한다. 절대적인 규칙이나 원리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놀이가 특정 상황이나 맥락 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맥락이나 상황을 익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우는 전부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형사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가려내기 위한 테스트도, 삶의 규칙이 아니라 특정 맥락을 어떻게 수용하는지를 통해 인간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또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의 반응 테스트 결과를 들으며 그들의 맥락을 파악하려 애쓴다. 하지만 테스트는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삶을 살고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의 정도에 따라 인간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식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겨난다. 인간 속에 있는 비인간적인 지점, 동물을 학살하고 공감하지 않고 연민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은 아니지만 살고 싶어하고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느끼는 비인간의 인간화된 지점 때문에 둘은 섞이게 된다. 이 둘이 섞이는 지점에서 영화의 또 다른 맥락이 드러난다. 자신의 죽음 속에서 자기의 삶의 기억이 사라진다고 ‘느끼는’ 안드로이드 로이 베티에게서 인간의 삶을 배우게 된 데커드는 비로소 자기의 맥락 속에 레이첼이라는 안드로이드를 들여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대부분의 삶이 이런 식인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나고 기존의 맥락이 뒤섞이고 분기하고 비슷한 상황들이 연속되거나 조금씩 달라지는 속에서 우리는 그냥 산다. 주지주의자들처럼 지성 때문에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니며, 뇌 신봉자들의 말처럼 우리의 세계는 뇌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착각도 아니다. 세계는 실재로 거기 있고 내 몸도 있고 의식을 만들어내는 뇌도 엄연히 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만나 특정 맥락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삶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처럼 삶으로부터 떨어져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뇌과학자들이 했던 것 같은 일이 생긴다. 삶의 규칙을 찾아내고 규칙을 통해 삶의 도식을 그려내고 그것이 마치 삶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는 메를로 퐁티의 말대로 체화된 몸이다. 이 체화된 몸은 비어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계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갈 길을 찾을 수 있다.”(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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