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S/Z님의 서재

에피쿠로스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원자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원자들은 영원히 운동한다. 원자들 중 어떤 것은 아래로 곧장 떨어지고 어떤 것들은 비스듬히 떨어지고 다른 것들은 충돌해서 위로 튕긴다... 이러한 운동은 출발점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자와 허공이 그 운동의 원인이기 때문이다.”(『쾌락』, 56-57) 바로 뒤엔 이걸 잘 이해하면 존재하는 것들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자연학의 이해가 존재론의 이해인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들의 편위를 옹호하기 위해 두 가지 논증을 펴는데, “첫째는 편위가 없다면 자연은 어떤 것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제1물체들에 편위라는 신기한 특성이 있는 이유를 생명체가 지닌 의지에서 비롯된 현상들에 대한 관찰에서 끌어온다는 점이다.”(172) 첫 번째 직선 낙하 운동에서 루크레티우스는 허공을 진공 상태를 가정하고 있는 것 같다. “물체 비율에 따라 낙하에 가속도가 붙지만... 허공에서는 가장 무거운 원자들도 가장 가벼운 것들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끼리 서로 충돌하지도 못하고, 집적체, 회오리, 세계 탄생에 기여할 수 없다.”(172) 물체의 무게가 달라도 그것들이 진공에서 직선 낙하하는 한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 맑스는 이 직선 운동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점이 선 안에서 부정(지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낙하는 모든 물체는 그것이 그리는 직선 안에서 부정된다. 물체의 특수한 질은 여기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사과도 떨어질 때는 쇳조각과 마찬가지로 수직선을 그린다. 우리가 낙하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한 모든 물체는 단지 움직이는 점일 뿐이며, 그것도 자율성이 없는 점이다.”(맑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 74)

원자가 직선 운동만 하는 한, 존재의 개별성은 없다. 왜냐, 직선 운동은 허공에 대한 원자의 운동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자가 보편적인 제 1물질이라면 자기가 자기 원인임을 표현하고 현실화해야 한다. 편위는 허공에 대해 원자가 맺는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고, 또 그런 관계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자립성을 구축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발적인 의지들, 개별성들의 충돌 혹은 만남이 우주의 생성 원리였던 것이다!

문득, 원자의 편위가 힉스 입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결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막 던져보기로 한다... 자연계에는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 있다. 이 네 가지 힘은 각각 그 힘을 매개하는 입자가 있고 또 그 힘을 구성하는 입자가 따로 있다. 중력을 제외한 나머지 힘들은 모두 게이지 이론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힘들은 서로 입자를 주고 받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전자기력은 광자를, 약력은 W와 Z를, 강력은 글루온을 교환하는데 이 입자들이 다 게이지 입자다. 게이지 입자는 기본적으로 게이지 대칭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런 대칭 상황에서는 입자가 질량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입자 중에는 광자와 글루온 빼고는 질량이 있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 여기에 과학자들은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는 이론을 마련한다. 그게 바로 힉스 입자이다. 힉스가 소립자들에게 질량을 부여하기 때문에 소립자들이 질량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물생성은 질량을 가진 것들의 탄생과 소멸이므로, 힉스에 신의 입자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다. 원자와 입자는 분명 다르지만, 직선 낙하 운동에서 힉스 입자의 개입으로 질량이 생겨나는 원자로부터 무수한 충돌이 생겨나면서 발칵 뒤집히는 우주 이미지는 비슷한 것 같다. 게이지 이론에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론이 현실화가 될 때 대칭성은 깨진다.)을 생각한 과학자가 꼭 에피쿠로스와 유사하지 않은가.

각설하고, 원자는 허공과의 관계에 의해 자신의 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원자가 속한 관계를 부정하는 편위가 원자의 실존을 확인해준다. 원자는 자신의 조건과 관계를 부정하고 벗어나는 한에서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 자연학을 이해하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의 실존을 규정하는 모든 관계들을 부정하는 것이 에피쿠로스에게는 쾌락이었던 것이다. 그가 마시고 먹고 노는 것에 대해 절제를 하도록 한 것은 그것들이 나의 실존을 규정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적 규준들이 나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이 좋은가. 진짜 싫다. 그건 고통이고 부자유다.

하지만 사람은 살면서 수없이 많은 관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를 규정하는 관계를 버리라는 말인가? 아니다. 편위와 직선 운동의 관계는 상보적인 관계이다. 원자가 직선 운동 하듯, 나도 세상 속에 있다. 원자가 직선 운동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기 의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처럼, 세상과 관계 속에서 나의 의지를 펼치는 게 나의 자유이며 나의 탁월함이다. 그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실존적 형식을 규정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관계가 나를 규정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윤리학은 사실 자유를 향한 노력의 윤리학이었던 거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