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화자는 자그마치 천 개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중심이라는 것이 없다. 게다가 목소리를 가지는 화자 역시도 인격을 지닌 존재보다 관념적인 화자(예를 들면, 만남 혹은 이혼 같은)나 사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추상적 주체들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서술하며 세계를 드러낸다.
“나는 만남이다. 오늘 나는 항상 지구의 회전에 맞춰 현재를 사는 요이치에게 물거품 호수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담수어를 소개하였다... 한편 잉어는 요이치의 흐물흐물한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가 전류처럼 생생하게 흐르고 있음을 인식하고, 백 년 남짓 살면서 이제야 비로소 대등하게 사귈 만한 인간을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둘은 보편의 물과 대기를 뚫고 잠시 서로의 가슴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동안 물결은 잠잠했고, 나는 새는 공중에 정지하였다.”(1권 72쪽)
관념과 사물의 세계는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기 일쑤다. 즉 소설에서 한번 쯤 목소리를 얻었던 것들은 단 하루만에 온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생명을 얻은 것이라면 응당 죽어야 마당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사물이나 관념이 드러낸 의지 역시도, 하루 만에 무의지로 변화하는 것도 이 소설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는 따스한 기운이다. 열렬한 애국심에 찬물을 끼얹고, 서민들의 속사정을 다 아는 척하는 위정자에게 자학의 미소를 띠게 하고, 치정으로 치닫기 쉬운 자의 머리를 식히고,....이렇게 하여 나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으나 해가 기울면서 다시금 청량한 가을이 나를 밀어내, 해가 지고 나서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2권 279쪽)
이렇게 화자가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마호로 마을을 감싸는 이 ‘나’라는 주체는 무한한 증식이 가능해 보인다. 그들은 매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노을이나 눈과 같은 자연현상 같기도 하고, 우두커니 집에서 잠자고 있는 사물들이 갑자기 생명을 얻어서 내는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아니 무엇이든 ‘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많은 ‘나’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요이치라는 병든 소년이다.
소설에서 요이치도 단 한번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한다. 늘 무언가의 배경 혹은 풍광으로 존재해서 일까. 요이치의 목소리는 마호로 마을의 수많은 사물의 목소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요이치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기에 앞서, 사물로서 자신을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사물의 운명처럼 요이치의 세계도 금방 사그라드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요이치, 사람과 사물의 경계에 선 이 뇌성마비 소년은 제법 단단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의지는 사물들처럼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키우는 큰유리새가 ‘되고’ 싶을 뿐이다. 자신을 매혹시킨 단 하나의 대상이 ‘되기’ 위해 요이치는 자신의 전생애를 아픈 몸뚱이를 거의 투신한다. 큰유리새라는 중심에 다가가기 위해서 세계를 배회하고 맴돈다. 쉽게 사그라드는 의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의 고정된 상이 되려고 하지도 않고, 흔들리는 몸을 고정하여 거리 위에 우뚝 서려고 하지 않는다. 눕거나 굴러버린다.
요이치가 그렇게 천일이라는 시간을 어슬렁거린 결과 머리칼이 저절로 유리색으로 변하고 마침내 천 일이라는 시간도 요동을 치며 변화한다.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온 몸의 경련이 새의 날개짓이 된 것이다. 마침내 천 일은 영원이 되고 요이치도 새가 된다.
그러나 이 새가 된 경험은 요이치를 죽이고 말았다. 의지 그 자체가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풍경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풍광이 된다는 것, 영원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의지라는 것은 애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풍광처럼 힐끗 포착되었다 사라지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