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부 한국 문학사 시대 구분론
2부 한국문학의 위상
왜 문학은 되풀이 문제되는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무엇에 대하여 고통하는가
무엇이 지금 문제되고 있는가
문학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국 문학은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
1) 제1기의 문학
2) 제2기의 문학
3) 제3기의 문학
4) 제4기의 문학
문학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우리는 왜 여기서 문학을 하는가
3부 문학사회학
1장 1920-3-년대의 문학사회학
1920-30년대의 문학사회학
1970년대의 문학사회학
2장 서양에서의 문학사회학
스탈 부인과 텐느
2플레하노프, 루카치 그리고 바흐친
골드만과 프랑크푸르트학파
아우에르바하, 에스카르피, 그리고 콘스탄츠학파
3장 문학사회학의 구조
문학사회학의 조건
문학사회학의 구조
분석의 한 예(1)
분석의 한 예(2)
문학사회학 : 결론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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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것은 희망의 추측 뿐이다." 26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도반한다. 그 쾌락은 반성을 통해 인간의 총체적 파악에 이른다....
그처럼 문학은 억압 없는 쾌락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준다. 그러면서 그것은 그것을 읽는 자에게 반성을 강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것을 안 당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한다. 인간은 이래야 행복하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50-51
"이 시대가 고통스럽고 간난한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행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시대에 행복을 생각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슐라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표현을 빌면 행복스럽게 숨쉴 수 있도록 태어났다. 그러니 숨을 잘 쉬는 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가." 58
"확실히 소비 사회에 있어서, 문학 작품은 물건화 되어 있다. 문학 작품도 또한 가짜 욕망을 만들어낸다. 가짜 자유나 가짜 예의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가짜 욕망은 문학 작품을 텔레비전의 광고처럼 단순화시킨다. 혹은 단순화된 문학 작품이 그런 가짜 욕망을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 작품은 그런 가짜 작품이 아니라, 물건화되고 상품화되는 작품의 외적 조건을 뛰어 넘는 작품이다." 63
"잘 팔리는 대중물이란 그러므로 미리 주어진 해답을 갖고 있으면서도 문제를 제시하는 척하는 나쁜 놀이이다. 그러면 당신은 재미없는 글을 쓰라고 권하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의 초점을 재미에 두는 태도 자체가 갖는 의미이다. 문제의 초점을 재미에 두는 한, 공식 문화. 대중화 현상 등의 현대 소비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과 맞부딪칠 가능성이 전연 없다.
....
나는 알고 있다. 대중을 계발하여 문학에 취미를 붙이게끔 재미있는 작품을 쓰겠다는 작가들의 대부분이 현대 소비 사회의 가짜 욕망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쓰느냐,
재미없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가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64
"어떤 진실이든 그것은 자기가 본 진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은 주체자의 의식이 진실이라고 파악한 진실만이 진실이다. 어떤 주체자의 진실과 어떤 또 다른 주체자의 진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있을 수 없는가? 진실은 고립된 것인가? 진실은 그래서 그것이 고립되지 않으려면 반성을 필요로 한다. 다시 한번, 그것이 고립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번성을 통해서 진실은, 그 고립성에서 벗어나 타인의 진실과 부딪친다." 66
"작가는 작품을 통해 바로 그것을, 한 그룹과 다른 그룹 사이에 소통의 방법이 있음ㅇ르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자기 자신이 그 소통의 징표가 됨으로써이다. 예술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 때문이다. 예술은 그 자신의 자율성을 획득해야 하며 동시에 사회적 사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율성에만 갇혀 있거나, 사회적 사실만이 되려고 노력하는 예쑬 작품이란, 예술 작품이 자신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사실이 되어야 한다는 그 예술의 애매모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체시켜 쉽게 해답을 찾아낸, 다시 말해 고통하지 않는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하지 않는 작품이란, 감히 말하거니와 성실하지 못하다." 74
"문학만이 억압하지 않으면서 억압을 생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75
" 작품은 심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이성과 무의식의 싸움의 장소이다. 앙드레 지드는 작가의 의도와 그 의도를 벗어난 것을 각각 작가의 몫, 신의 몫이라고 불렀다. 작품 속에는 작가의 몫과 신의 몫이 항상 공존하고 있는데, 어느 편이냐 하면 신의 몫이 많을수록 작품은 생기를 띤다는 것이다." 89
"그렇다면 누가 의미를 부여하는가? 작가 외에 작품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는 화자이다. 플로베르에 의해 개진된 그 생각은 비개성적이고 전능한 하나의 의식을 설정하고 있다. 그 의식은 전체를 꿰뚫고 지배한다. 그러나 헨리 제임스나 사르트르 같은 작가들은, 전능한 화자의 시선을 벗어나는, 소설의 예를 들자면, 주인공의 자유를 주장한다. 텍스트 속에서도 한 개인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그 나름의 개인성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자유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 텍스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각각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데리다에 의하면 글쓰기의 주체란 텍스트를 이루는 여러 묘상들의 관계 체계이다. 1071년의 한 인터뷰에서 "글쓰기의 주체란 만일 그것으로 작가의 어떤 지고한 고독을 지칭한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글쓰기의 주체란, 마술적인 것, 정신적인 것, 사회.세계의 여러 묘상의 관계 체계이다."라는 명제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텍스트의 주체 문제는 텍스트 안에서 찾아야 하며, 밖에서 찾을 때, 주체는 없다라는 것이다. 91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은 절망적인 고통이 아니지 않은가." 96
<한국 문학은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
"내가 취하고자 하는 관점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형성된 현대적 문학적 관점이며, 그 서술 방법은 역사적 서술 방법이다. 역사적 서술 방법에서 당연히 문제될 것은 시대 구분 문제이다. 역사학계에서 시대 구분 문제가 제기된 이후, 70년대초에 문학계에서도 시대 구분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대체적인 경향은 왕조별로 나누는 재래식의 방법에 약간의 손질을 가하는 것이었다. ....
제1기 : 삼국 통일 이전 (676년 이전)
제2기 : 삼국 통일 이후부터 무신란까지 (676년부터 12세기까지)
제3기 : 무신란에서 이조 영.정조까지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제4기 : 영.정조에서 현대까지 106-107
"제 3기의 문학
한국 역사에 있어서, 불교가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대두하게 되는 과정은 왕권 신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사상적 기저에 신분적 불평등이 선험적인 것이라는, 지배층이 피지배자들을 자기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 통합시키기에 썩 편리한 논리를 갖고 있는 불교는, 왕의 존재를 신격화하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왕권의 신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불교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신의 신분적 불평등을 교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대부분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매달렸다." 125
<문학 사회학: 서장을 대신하여>
작가의 경제적 독립은 근대 사회의 기술적 발달과 밀접한 관계 197
문학과 사회의 관계 규명 : 문학을 위한 문학과 인간 사회를 위한 문학 198
"한국에서 순수 문학 참여 문학은 가짜 대립이다. 문학은 극서이 제작되어 판매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현상이며,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표현 기구이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에서부터 문학의 그 이중적 성격은 분리할 수 없는, 이중적이며 단일한 성격이다. 그 이중적이며 단일한 성격을 파괴하지 않으려면 두 개의 차원으로 문제를 나눠야 한다.
위 두 명제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문학과 사회에 대한 개념 정의를 해야한다..199
문학이 비현실적 기능을 한다면, 사회는 인간이 질서있게 살 수 있도록 제도화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적 기능을 한다.
"문학적으로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질서 있게 살아가기 위해 제도화시킨것을, 쾌락 워칙에 의거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꿈에 비추어서
재반성하는 것을 뜻한다. ..이 사회에서는 어떠한 꿈이 어떠한 형태로 제도화되어 있는가, 제도화는 어떤 모순을 드러냈는가, 그 모순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를
문학은 꿈. 행복에 비추어 드러내는데, 문학의 특수한 점은 그 드러냄이 결핍에 의지해 있다는 점이다. 199
"문학은 꿈에 비추어 어떤 것이 어떻게 결핍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드러낸다. 문학의 자율성이 획득한 최대의 성과는 현실의 부정적 드러냄이다. 그 부정적 드러냄을
통해서 사회는 어떤 것이 그 사회에 결핍되어 있으며, 어떤 것이 그 사회의 꿈인가를 역으로 인식한다. 200
"꿈을 결핍의 형태로 드러내는 일은 복잡한 층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문학 형태상으로는 쟝르. 문체. 비유 등의 여러 층위의 약호의 제약을 받는다. 즉 언어의 제약을 받는다.
자기 시대와 환경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믿는 순간에도, 그의 노력은 그의 시대나 환경 속에 갇혀 있다. 따라서 꿈은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떤 꿈은 제도가 갖고 있는
모순, 갈등의 오랜 축적의 결과이다. 문학의 형태(쟝르. 문체. 비유)는 문학적 꿈이 문학으로 표시되기 위한 최소한도의 규제이다.
문학사회학적 접근의 지평을 연 것은 김기진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의 전국면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관찰. 인식하는 것이었다. 203
현실의 여러 국면의 부분적 인식과 그것과 현실의 전국면의 관계의 인식은, 사회 현상의 전체적. 역사적 발전의 방향과 발전을 간으케하는 원동력을 파악해야
가능한 인식이다...그러나 김기진의 경향 문학론과 비평론이 깊이 있게 개진되지 못함. 205
박영희(1901-?)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학사회학적 접근을 반대한느 입장에서 임화(1908-53)는 사회사를 문학사 속에 끌어들이는 입장에서, 이헌구는 사회학적인
문학 연구 계보를 따져보는 소개. 비판자의 입장에서 문학사회학 접근.
박영희는 김기진과 함께 카프에 참가하다가, 카프 활동이 경직되자, 탈퇴하여 마르크시즘 문학 이론에 맞설 문학 이론을 수립하려고 애쓴다.
그 노력의 시발이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구절을 포함한 논문과 책 <문학의 이론과 실제>이다.
그는 문학사는 사회사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경제 생활은 토대를 이루고 그 토대 위에 정신 생활이 세워져 있다. 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경제 생활의 반영이다.
박영희의 주장은 바로 그 두 사항이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다른 차원, 서로 관계는 있으나 종속의 관계는 아닌 차원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207
"루카치의 전체성. 총체성 개념은 소설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루카치는 현대를 헤겔과 함께 산문적인 세계 상황으로 규정하고 호머의 서사시에 나타나는 시적 세계 상황과 그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시적 세계 상황의 특징은 자연과 정신, 도덕과 법률, 개인과 공동체, 다시 말해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가 아직 분열되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원의 세계이며, 인간의 의식은 자체 반성의 필요 없이 수동적으로 외부 세계에 순응하면 되는 것이며, 개인은 세계와 자신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생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세계이다. 루카치는 바로 그 세계를 총체성. 전체성이 지배하고 있던 세계라고 말한다. 그것을 뒤집으면 루카치에게 있어 전체성이란, 외부와 내부가 분열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원을 뜨한다. 호머의 서사시 이후에 전개된 세계는 그런 호머적인, 희랍적인 총체성이 상실된 세계이다. 그런 전체성이 상실된 세계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의식인의 넋을 지배하는 것은, 호머적인 전체적 세계 상황에 대한 향수. 동경이며, 그것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다. 소설은, 바로 그 향수. 동경. 노력의 표현이다. 소설은 더 정확히, 형이상학적 실향의 시대, 형이상학적 지붕이 없는 시대에, 전체적인 세계와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이다. 그 문제적 개인은 비록 시민 사회의 관습과 가치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외롭게 방황하고 있으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뚜렷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전체성을 향한 동경과 추구이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심리적 지향성이다. 그 심리적 지향성이 형식화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며 객관적 의식이 필요시되는데, 그것이 바로 윤리성이다. 서사시에서 윤리성은 세계내에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에, 서사시의 형태는 그 자체가 쉬고 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면, 소설에서 윤리성은 전체성을 찾으려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소설 형식은 발전되어가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 윤리성을 교정. 극복하여 그것이 올바른 것이 되게 하는 통합적 요소가, 자기 작품에 대해 작가가 갖는 거리,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에 의해 가능해지는 전체성의 형상화로서의 소설 세계에 나타나는 전체성의 세계는 물론 호머의 서사시에 나타나는 총체성의 세계는 아니지만, 현대의 역사 상황의 한계 속에서 현대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구조이며, 서사시적인 전체성에 가장 접근한 하나의 전체성이다. 그 의미있는 구조는 의미없는 삶에 대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식의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성숙한 남서이 세계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서사시는 전체성의 유년, 의식과 죽음의 문학인 비극은 청년, 소설은 장년기 문학이다. 그의 의식에서 서사시-비극-철학 소설은 발전적 형태의 표현들이다. ...
초기 루카치는 신없는 사회에서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현대인의 고뇌에 바탕을 둔 사회학이다. 현실 밖으로 탈출하지 않고 의식으ㅗㄹ 자신의 위치를 보려한 비극적 세계관의 표본이며, ....그러나 실존주의로의 길을 포기하고 확실한 전망으로 사회주의를 택해 그것을 다시 비판하게 되는 것이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 수락은 그렇다....그때 그의 미학은 윤리학의 시녀가 된다.
"루카치 소설 이론의 첫번째 유형은 이상소설. 세르반테스 동키호테 : 주인공이 역사적 상황,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의식 못하고 과격한 이상주의와 신이 없는 세계에서 자기가 신의 역할을 하려는 마성적 내면성 때문에 외부 세계를 잘못 판단해 함부로 행동하는 소설.(적과 흑)
두번째 유형은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으로 대표되는 낭만소설 : 완전히 산문화된 세계에서는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인식, 주인공이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내면으로 후퇴하고 그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려는 유형.
세번째 유형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같은 교양소설 : 주인공이 세계 상황, 즉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단절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유형. 괴테식의 교양소설의 특색은 그 주인공이 소설의 구성원들과 함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함으로써 휴머니즘에 도달하려는 이상을 갖고 긴 교양의 길을 가는데 있다. 여기서 형성되는 내면성은 현재 상황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정신 세계, 예술 형식, 살므이 형식이다. 루카치가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베케트를 비판하는데 이같은 미학이 크게 작용했다.
바흐친. 사회학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는 말에 있어서의 억양, 문체의 톤을 중요시한다. 그것은 고립된 말이 아니라, 사회적 문맥 속에 있는 말에 그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서, 그의 이론의 중심을 이루는 대화주의가 생겨난다. 그의 대화주의는, 언표와 언표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개념이다. 다른 언표와의 관계를 맺지 않는 언표란 없다. 바로 그 대화주의를, 크리스테바는, 텍스트 상호 관련성, 혹은 간단히 간텍스트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intertextualite'라는 말로 옮기고 있는데, 그것은 문학 연구에서 대단한 효과를 내는 개념이다. 언표가 항상 다른 언표와 관련을 맺고 있듯이, 텍스트 역시 다른 텍스트와 항상 관련을 맺고 있다. 그 관련은, 한 작품내의 여러 문장들의 관계, 한 작가의 전작품내에서의 서로의 관계ㅡ, 여러 작가의 여러 시대의 작품 사이의 관계 등등을 총괄한다. 그 고나련이 바로 작가-작품=독자의 상호 관련성의 근거를 이룬다. 그것은 작품이 여러 개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음을 뜻하며, 그 여러 개의 목소리가 다양하게 울리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사실상 바흐친의 대화주의는 독자의 작품 참여도를 최대한도로 늘린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 시학은 콘스탄츠학파의 수용 미학에 가깝다.
<골드만과 프랑크푸르트학파 : 새로운 문학사회학을 향하여>
예술의 자율성의 인정이라는 측면에서는 골드만과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예술 이론가들, 로웬달, 벤야민, 마르쿠제, 아도르노 등은 예술 작품이 사회 현실에서 맡고 있는 부정적 위치에 더욱 주목하여, 루카치와는 정반대로, 보들레르, 로브 그리예, 베케트, 카프카 등의 예술적 가치, 그 부정성을 옹호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그들이 브레히트의 의도적 전위주의에서도 벗어나, 전위주의의 과격성을 예술적 부정성으로 극복한 것을 보여준다.
<숨은신>
<소설사회학을 위하여>
골드만이 인문.사회과학 연구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과학적. 실증적 방법이다. 그렇다면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 즉 변증법적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인간과 관계된 사실은 언제나 실제적. 이론적. 감성적 성격을 동시에 띠는 전체적 의미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 구조는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 구조가 설명되고 이해된다함은 변증법적으로 하나의 중간항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의미 구조는 그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것보다 큰 주고 속에 삽입되어 설명될 수 있다. 그 구조가 중간항일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이다. 의미 구조가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더 큰 구조를 상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변증법적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사고는 부분/전체의 보완적 관계에 의해 사고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진실, 의미 구조의 해명은 이해 과정이며, 더 큰 구조, 전체 속에 그것을 삽입하는 설명 과정이다...작은 의미 구조는 큰 의미 구조 속에 삽입되어야 설명될 수 있다. 큰 의미 구조는 감싸는 구조, 감싸는 것이다. 이 인식의 조작적 기능은 골드만 사고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해. 설명. 감싸기 등을 문학 작품에 적용하게 되면, 작품-전작품-인간-사회 집단의 방향으로 감싸기 진행되면서 그 부분적 진리 인식이 진전되어 큰 의미 구조에 이르게 된다.
..그 감싸기의 결과로서 골드만은 문화 창조 주체는 개인이 아닌 사회 계급이라는 충격적 결론에 이른다.
...인간 관계의 복잡하고 다양한 총체가 개인의 일상적 삶과 그의 개념적 사고나 창조적 상상력 사이의 단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하다...
변증법적 감싸기, 편입에서 골드만이 발견해낸 것은 사회 그룹이다. 그런데 이 사회 그룹이 모든 사회 계급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계급은 바뀌고, 이데올로기의 국면에서 현재 인간 총체, 그 질, 결점, 이상 등에 대한 시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시점은 한 계급의 가능한 의식의 최대치이다. 한 그룹의 성원을 모아주며 다른 그룹에 대립되게 하는 한 그룹의 열망, 감정, 사고의 총체를 골드만은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소설사회학의 이론적 발단으로 골드만은 근대 소설에 왜 문제 제기적 인물들이나오는가 따진다. 루카치의 도움을 받아,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다보면 죄인이나 광인과 같은 문제 제기적 인물이 생겨난다는 것. 소설에 있어서는 주인공과 세계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는 것이다. 267
소설은 단절 문제에 따라 서정시와 서사시로 나뉘는 장르 이론에서 중간에 위치. 그러나 이것으로 인물을 설명하면, 소설 발생을 사회적 경제적 정화속에 끼워넣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루카치는 가설을 제시하는데, 소설 세계의 형태는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부터 발생된 개인주의의 사회에서 일상적인 삶이 문학적인 차원으로 뒤바뀌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과 재물과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관계는 생산이 미래의 소비에 의해서, 물건의 구체적인 품질에 의해서, 즉 사용가치에 의해서 지배되는 관계이다. 그런데 시장을 위한 생산 특징을 이루는 것은 그와 반대로 교환가치라는 생산형태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경제적 현실의 중개로 인간적인 의식의 관계가 배제되거나 혹은 내재화되어버린다.
의식적이고 표면적인 차원에서 경제적 생활은 교환가치, 다시 말해 타락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구성되며, 생산의 측면에서는 이러한 사람들 외에 소수의 사람들, 모든 방면에서의 창조자들이 남아 있어 본질적으로 사용가치를 지향하는 바로 그 점 대문에 그들은 사회에서 밀려나 문제적 개인이 되는 것이다. 소설 쟝르의 구조와 교환 구조 사이에 대응. 상동이 있다.
그렇다면, 경제 구조와 문학적 표현 사이의 관계가 집단 의식을 떠나서 이루어지는사회라면 그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 경제적 행위가 이루어지고 교환가치가 존재하면서부터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이느이 사고에는 간접화라는 범주가 발생한다. 간접화된 가치는 점점 절대적 가치가 된다. 돈이나 명예는 절대적 가치가 된다.
2) 그런 사회에는 사고와 행동이 질적인 가치에 의해 지밷받는 문제적 개인들이 생겨나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사회의 전체적 구조에서 일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락한 간접화 현상의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3) 중요한 작품치고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없다. 감정적 욕구가 사회의 모든 계층, 아니면 소설가가 속한 중간 계층에서만이라도 누적되어 있을 경우메나 발견될 수 있다.
4) 시장을 위한 생산 체계의 자유 경쟁 사회에서도 자유로운 개인주의의 가치가 생겨난다.
문제제기적 인물의 소설은 부르조아지 역사와 발전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문학 형태지만, 부르조아 계층의 실제 의식이나 가능한 의식 표현 형태가 아니다. ..
부르조아 사상의 합리성 때문에 예술의 존재마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거기서 골드만은 긍정적 인물의 소설이 생겨나지 못한 근거를 보고 있다.
<벤야민>
문학사회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는 내부에서 하나의 소우주 그 이상인 소우주로 형성되는 작품의 운명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역사적 정황의 예술의 테크닉을 혁신시키고 예술 개념 자체를 바꾸게 되는 새로운 역사적 변이를 문학사회학적으로 규명하고,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비평에 반발하여 문학적 정치의 개념을 확립한 이론가이다.
그가 아우라라고 하는 것은 "예술 작품에서 개성을 구성하는 계기로, 예술 작품이 지니고 있는 아주 미묘하고도 개성적이며 고유한 본질같은 것을 의미"(차봉희 <문학과 지성>36호 478-9) 예술 작품이 풍기는 고고한 분위기는 아우라 때문이며 그 개성적이며 근접하기 어려운 분위기 때문에 자율적 존재로서의 예술이 가능해진다. 그 개성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는 예술 작품이 갖고 있는 제의적. 의식적 성격에서 나온다.
종교, 신적인 것은 예술 작품에 어떤 사적인 힘을 부여하고 작품을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감싼다. 그의 아우라는 예술 작품의 제의적 가치를 시간.공간적인 감지의 범주에서 표현하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그 아우라를 제거해버린다. 이것은 예술의 탈의식화에 다름아니다.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고전적인 의미의 예술 속에 끼어들 수 없는 선언,ㅡ 말. 자료, 모조품이지만, 거기서 예술 작품에 대한 제의적 거리감을 제거해주고 있다는 새로운 경험이 생겨난다. 그것은 일종의 해방이며, 종교적 트임이 아닌, 세속적 트임, 비종교적 트임이다.
가장 신비스러운 것을 일상에서 발견하는 초현실주의적 경험은 개방적인 것이다. 작품에서 분위기를 지우는 것은, 작품을 고독한 예술 행위라는 명상적 감상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것이 벤야민의 해방이다. 그 해방은 행복의 경험인데 "범속한 트임의 자세로 아우라적인 껍질을 깨뜨리는, 즉 아우라 상실의 경험은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이해되고 통용되는 가장 범속한 의미에서 외면적이고 공적인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행복은 가장 감각적이며 물질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세속적 경험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아우라의 상실-해방의 논리는 기술 복제 가능성이 압도적인 새로운 예술의 기능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의 기술 복제 가능성이 의식에 대한 기생적인 존재라는 예술작품의 역할을 세계사내에서 처음으로 실현시켰다...그 순간 예술의 전반적인 사회적 기능 자체도 전복되었다. 예쑬의 의식에 기초를 두지 않고 다른 유의 어떤 실천에 기반을 두게 되는 현상이 대두되었다. 이 새로운 기반은 다시 말해 정치다."(차봉희 역 56-57)
<마르쿠제: 쾌락원칙의 우위>
마르쿠제에 의하면 예술은 전산업사회에서는 현실과 다른 차원을 이룩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욕망을 상상력에 의한 환상 속에서 달성혹은 해소하게 만들어준다. 전산업사회의 예술은 기존 질서의 부정. 부패와 부의 힘인 동시에 불가능한 욕망에 사로잡혀, 만족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매개로 생존과 화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에로스와 문명>에서 말하듯 예술 속에는 양가 감정 즉 낯선 감정과 안도의 감정이라는 두 가치가 대립하고 있다. 예쑬은 고통이 제거되고 승화된 세계를, 공포가 절제 있게 규제된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기서 예술의 소외가 생긴다. 예술은 사회를 거부하는데서 생겨났지만 그것은 사회에 매달려 있다. 예술적 소외란 그러므로 "의식적이며 거리감이 있는 형태에 병합된 소외"이다. 결국 전산업 사회의 예술은 부정에서 마술적 힘을 끌어오지만 부정이 극단회되어 사회를 해체하는 것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사회의 긍정에 협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산업 사회 에술은 낭만적이다.
산업 사회에서 예술은 낭만적 부정과대립의 힘을 잃어버린다. 과거 작품이 대량 보급되어 충격적 낯선 느낌을 잃어버림. 금지가 없을 때, 예술의 형태속에 숨길 필요도 없다.
현대문학이나 예술의 대부정이 모두 사호에 편입되었다면 에술에서 기대할게 무엇인가. 억압 없는 유토피아 사회에서 예술이란 현실과다른 차원에 있지 않으면서, 모든 모순을 화해시킬 수 있으리라는 벤야민적 신념을 피력한다. 283
그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믿고 있다. 그의 신유토피아론은 쾌락 원칙의 현실 원칙에 대한 우위에 근거해 있다. 쾌락 원칙은 억압 없이 욕망을 자유스럽게 달성하려는 원칙이며, 현실 원칙은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며 질서와 진보를 이룩하려는 원칙이다.
<아도르노: 고통의 언어>
<미학이론>에서 그는 예술 작품이란 경험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고전적 명제에서 출발해 현대 예술론의 중요한 부분인 앙가쥬망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허구성을 밝히는 어려운 작업을 해내고 있다. 아도르노는 마르쿠제가 일차원적 사고라고 부르는 긍정 정신을 산업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현대 예술이란 그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감추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란 언사는 일상 생활에서 개인을 억압하여 이차원적 사고를 불가능케 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그것은 가짜 욕망과 기구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억압적인 공식적 문화를 만들어낸다. 현대 예술이 표현하고 있는 고통은 그 공식 문화 속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모든 노력의 결과이다. 그 노력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공식 문화의 허위성을 밝히고, 그것이 거짓으로 세계와 인간을 화해시킨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술은 그 거짓 화해를 드러내는 고통의 언어이다.
앙가쥬망론과 경향문학론의 최대 약점은 예술의 내용과 형식을 구별하고, 혁명적 작가는 내용을 쉽게 써야 한다는데 있다. 예술의 형식은 침전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쓉게 써야 한다, 혹은 리얼하게 써야 한다는 것은 현대 예술이 그토록 벗어나려고 애쓴 가짜 화해를 20세기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상품화를 통해 이룩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285
아도르노의 태도는 벤야민과 흡사하다. "한 작품의 경향성이란 그것이 문학적으로 옳을 때에야 정치적으로 옳다"(벤야만 <브레히트론>)
"작품이란 그 모습과 형식 구조에 의해 비화해가 살아 남아 있는 세계의 고통을 증언하는 법이므로, 그것의 약속은 직접적일 수가 없고, 가능한 행동의 약속일 따름이다."그렇게 본다면 양가주망이나 경향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정치적으로 참여된 작품이란 체제 속에 흡수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비전술적 방법이다. 즉 뇌관을 제거당한 폭탄인 셈. 286
아도르노 이론의 충격은 인간을 사물화시키고 소외시키는 지배적 이데올로기 비판을 결국 그것에 흡수될 이데올로기적 방법으로 행하지 말고,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형태로서 행해야 한다는데 있다. 새로운 형태는 그것 자체가 비판 인 것이다. 그의 전위 예술,베케트 옹호는 거기서..
쇤베르크 표현을 빌면 "사람은 화폭을 그리는 것이지, 그 화폭이 재현하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화폭은 소외, 사물화 바로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치 문화와 같은 억압 문화 속의 인간의 불행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