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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고 쓰는 Syo

 

범인은 아렌트?

 


시험은 이제 22일 남았다. 시간 새끼, 정말 잘도 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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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이 책을 통해 syo는 총 4가지를 새로 알거나 고쳐 알게 되었다.


  

첫째, 타자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감수성이 늘 훌륭하지는 않았다는 썰. 특히 그의 저작을 읽은 이들이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바를 생각해보면 이것 참 뜻밖이로세 싶을 정도.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 교육하는 것은 미국수정헌법 제 14조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남부는 즉시 들끓었다. 이 판결로 학교를 갈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 엘리자베스 엑포드라는 이름의 14살 흑인 여자아이가 리틀록 센트럴고등학교로 등교하는 첫날, 1957년 9월 4일, 주지사는 그녀를 막기 위해 총검으로 무장한 주 방위군을 그녀의 등교 길에 투입했다. 길에 늘어선 백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위협했다. 



그러나 엑포드는 자신이 얻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그리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백인들의 험한 표정이) 찍힌 사진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자 마침내 한나 아렌트에게도 이 사건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뜻밖에도(이 뜻은 syo 뜻) 아렌트는 공립학교에 흑인과 백인의 통합 교육을 강요하는 연방정부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정부는 사회적 차별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합법적으로 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부는 평등-사적 영역에서는 획득될 수 없는 원리-의 이름으로만 행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정부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적 관행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이런 관행들이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 교육은 사적인 문제이어야 하며, 정부는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에 대한 부모의 결정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 만일 유대인인 내가 유대인 친구들과만 내 휴가를 즐기겠다고 한다면 이런 내 계획을 어떻게 누가 합리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이는 마치 다른 휴양지 업소가 휴일을 보낼 때 유대인을 보고 싶지 않아하는 고객을 유치하면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내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그녀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그러나 휴가를 함께 보낼 친구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과 관련된 (그다지 악성이 아닌) 사회적 차별과 흑인들이 일상적 삶에서 강제로 경험해야 했던 폭력적 차별을 비교하는 것은 극도로 무감각한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사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구별을 잘못 강요했다. (...)

  아렌트의 둔감함이 당혹스러운 이유는 인종차별에 대해 더욱 공감할 수 있고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그녀의 저술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흑인을 유비적으로 보는 방식은 조심해야 하지만, 그런데도 아렌트는 누군가가 유대인으로서 공격받을 때는 독일인으로서가 아니라 또 인권의 담지자로서가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선언했던 때의 자기 경험에 근거해 흑인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86)


추후 아렌트는 그녀에게 쏟아진 다양한 비판들을 수용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의 견해가 올바르지 못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인간의 조건』의 저자이며 향후 몇 년 안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대한 무능력함’을 강력하게 비판하게 될 거장조차 모든 순간 쉬지 않고 위대한 인간일 수는 없다는, 어찌보면 평범한(진부한) 사실의 진부한(평범한) 사례라고 해도 될까?

 

 

둘째, 알고 보니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지만, 오히려 속았기 때문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기막힌 통찰을 길어낼 수 있었다는 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예루살렘 재판정에서 보여준 태도, 광신적인 나치 분자보다는 평범한 관료에 가까운 모습, 상투어로 가득한 변론 등을 토대로, 내면에 수천 마리의 괴물이 들끓는 것이 악이 아니라 괴물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악이며,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거나 심지어는 선량하다는 평을 받는 사람조차 ‘무사유’의 허방을 잘못 짚으면 상상도 못할 크기의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던졌다. 그런데 그 후로 아이히만의 행적이 더 상세히 알려졌는데, 독일을 탈출하여 아르헨티나에서 살던 때의 아이히만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오던 ‘평범하지 않은 악인’의 모습에 가깝다고 한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아이히만'까지 보았더라면 ‘악의 평범성’ 개념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이렇게 판단했다.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홀로코스트의 수많은 가해자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히만에 대해서는 아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자기연출 전략에 속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부분적 이유는 그가 흉내 낼만한 수많은 가해자가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98)


아이히만이 자기가 개새끼라는 데 당당한 개새끼였다면 ‘악의 평범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더라도 한나 아렌트의 작품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봐도 될까?

 

 

셋째, 이건 소소하고 개인적인 것이지만, 플라톤의 『국가』를 다시(똑바로) 읽어봐야 되겠다는 썰......

 

플라톤의 『국가』의 주요 주제는 철학과 정치 사이의 갈등, 즉 철학적 진리와 정치적 의견 사이의 갈등이다. 정치는 불안정하고 서로 충돌하는 의견들에 기초한 것이지 영원한 형상에 대한 참된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므로, “진짜” 정치에서는 권력과 힘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는 정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논박하고, 참된 정의는 철학자들이 알기를 열망하는 이성적 진리의 영원한 기준에 부합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관적 논증으로 읽을 수 있다. (107)

 

일단 2500살쯤 먹은 책은 그 자체로 뜨악한 데가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syo같은 새빨간 유물론자와 ‘이데아’, ‘영원한 형상’ 같은 단어가 만나 일으키는 화학작용은 찌푸린 미간, 풋- 하는 비릿한 웃음과 한쪽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유발하고, 그 결과 책은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는 확률로 침대 한 구석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배배 꼬인 마인드를 견지하고 『국가』를 계속 읽어나가면, 결국은 철학자가 독재 정치해야 된다는 거잖아. 이건 ‘철학자’라는 양반들이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해 짜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군, 하는 시시껄렁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의 신이 강림하신다고 해도 그의 독재에 동의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정치체제’를 다루는 책으로서의 『국가』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

 

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국가』를 ‘정의’에 대한 생각거리로 쓰자고 들면, 좀 다른 결론이 날 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철학자들이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이 ‘정의’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정의 구현’이라는 뜻이다. 정의는 불변의 실체일까, 합의의 결과일까, 강한 자의 이데올로기일까. 정의는 과연 이룩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못 들어 올릴 것 같은데 자꾸 한 개만 더, 한 개만 더를 외쳐대는 트레이너처럼,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만 주며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는 데 의의가 있는 가상의 골인 지점일까.

 

결국 달리 생각하면 『국가』는 정의를 정의하는 토론회에서 어느 한쪽 참가자가 토해놓은 열변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가 통치하는지의 문제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숨겨져 있는 구조를 세세하게 살펴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아직 많지만, 거시적으로 봐서는 거의 답이 나온 문제라 진부하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이야기라면 유통기한이 없지. 어쩌면『국가』를 국가에 대한 책으로 읽어서 재미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앞으로는 책 좀 똑바로 읽어.....

 

 

마지막으로, 번역자 김선욱 선생님에 대한 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이 책의 역자가 같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주술호응이 어긋나거나 잘못된 조사가 사용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독히도 읽히지 않는 문장들이 가득해, 가뜩이나 없는 재미가 더 없었다. syo는 그것이 역자의 역량, 편집자의 역량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정말 건방지게도. 그런데 이 책의 문장은 깔끔하고 읽기에 무리가 없었다. 뭐야, 그러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그랬던 것은 한나 아렌트가 그런 거야? 와, 아렌트가 그랬어?

 

그러고는 뒤져봤더니, syo는 이미 김선욱 선생님이 쓰신 『한나 아렌트의 생각』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기억이 났다. 아주 괜찮게 읽었었는데. 그리고 그때의 평을 찾아보니 이렇게 써 놨다.

 

- 깔끔하다.

- 한나 아렌트 입문서로 몹시 훌륭하다.

- 핵심만 쉽게 꽂아놓았다.

- 그러다보니 원전을 왜곡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 한나 아렌트 입문 첫 책은 바로 이것.


이렇게 빨아놓고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번역이 구리다고 깠다..... 왜 그랬을까. syo가 왜 그랬을까..... 여러분, syo라는 놈의 서평 능력이 이렇게 떨어집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맨날 잡글만 쓰는 거라구요(핑계)......

 

 



--- 읽은 ---

+ 심용환의 역사토크 / 심용환 : 78 ~ 294

+ 감염된 독서 / 최영화 : 54 ~ 306

+ 싸우는 식물 / 이나가키 히데히로 : 11 ~ 235

 

 

--- 읽는 ---

- 산수의 감각 / 조지 셰프너 : 38 ~ 124

- 이야기 한국 미술사 / 이태호 : 62 ~ 124

- 도시를 보다 / 앤 미콜라이트, 모리츠 퓌르크하우어 : 8 ~ 55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7 ~ 46

-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61 ~ 68

- 화재의 색 / 피에르 르메트르 : 11 ~ 302

- 책 쓰자면 맞춤법 / 박태하 : 5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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