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69다방
  •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임영태
  • 10,800원 (10%600)
  • 2010-02-01
  • : 726

일상의 관찰, 공간의 느낌을 깊은 사색을 통해 잘 표현한 작품이다. 아주 오래간만에 울림이 있는 문장들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서사적으로 요즘 나오는 소설들처럼 흡입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나, 작가의 무게감 있는 한문장 한문장이 책장을 넘기는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생각한다. 소설의 구조도 그러하다. 현실의 깊이를 과거가 더해준다.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이 한 사람의 뒷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서 주절거려 본다. "어쩌면 삶은 쓸쓸함일지도 모르겠다." 

 미래를 살아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떠 들지만, 결국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과거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의도와 의식은 상극의 관계이다. 소설의 나오는 주인공의 아내는 비중이 많지는 않지만, 그의 시선에 보여지는 아내의 모습은 아름답다. 독자로서 그의 아내를 생각할때 미안하다고 사랑하다고 보고싶다고 말하싶다. 그리고 그런 아내와 살고 싶다고 생각이 든다. 소설은 주인공의 시선과 관념을 오롯이 따라가면서 서사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시킨다. 앞서 말했던것과 같이 현재를 통한 과거의 보기의 쓸쓸함때문이 이것이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아름답지만, 쓸쓸한...소설이다.

▲ 밑줄 긋기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생의 어느 한 부분을 안다는 것으로 서로 얼굴 한 번 안 본 사이끼리 위안과 격려를 주고받습니다. 그런 소설이 되기를 바랐고, 그것이 교감되었다는 것이 기쁘고 고맙습니다. (표지 안쪽 작가의 말) 

생의 의미를 찾아 멀리 떠날 것까진 없다. 의미는 사무실 소파 아래에 뒹구는 막걸리 통에도 얼마든지 있다. 의미는 사무실 소파 아래에 뒹구는 막걸리 통에도 얼마든지 있다. 의미를 몰라 인생이 건조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하루에 두 번씩 거리의 색채를 바꾼다. 해가 뜰 때보다 질 때가 더 갑작스럽고, 더 슬프다. 몰락이라는 단어는 석양에서 왔을 것이다.(11쪽)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사치는 가져가는 게 좋다. 정신의 사치는 우울증을 막아준다.


남자가 들어왔을 때 환기를 하느라 열어놓은 창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나는 일어나서 창문을 닫았다. 창가에 서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덤덤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자기 인생을 누구에게 이해받을 필요는 없다. 이해라는 건, 자식이나 마누라가 아닌, 맞은편 막걸리 집에서 몽롱하게 취해 바라보는 어느 손님이 뜻밖에 해줄 수도 있는 일이다(15쪽) 오래된 사물에는 세월을 견뎌 온 고유한 질감이 있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시절들이 희미하게 번져 있어, 단지 먼저 살아냈다는 이유만으로 보는 이의 인생을 문득 긴장시킨다. 거기에 보이는 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 시간으로 괴어 있는 낯익은 슬픔일 것이다.(26쪽)   


나이가 마흔쯤 되면 버릇이 옹이처럼 삶에 박힌다. 무심코 반복되는 그것들 속에 욕망도, 상처도, 사는 방식도 다 들어있다.


사르트르 <구토>의 한 부분

주인공은 무심코 문고리를 잡다가 서늘하게 놀란다. 차갑고 딱딱하던 문고리가 물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사물, 아니 생물로 느껴진다. 문고리가 생물이 되고 나니 주인공 남자와 문고리는 이제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된다. 그러자 모든 존재가 갑자기 낯설어진다. 문고리가 생물이 되는 대신 정상적인 사람들은 짐짝이나 고깃덩어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래서 구토를 하고 만다.

한 번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그 일이 돌아온다.


슈뢰딩거 고양이 실험.

우연을 운명으로 의식하는 순간 운명은 바뀐다. 안 거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것이 시작된다. 슈뢰딩거 고양이 이야기는 실종된 운명의 이야기다. 우리가 확인한 고양이의 죽음은 우리가 불러일으킨 일일 뿐, 고양아의 진짜 생사는 상자 뚜껑을 열기 전의 그 시간에 있다. 운명은 ‘모르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아는 건, 안다는 그것으로 인해 운명이 아니다.


산자가 보내지 않으면 죽은 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못 떠나는 건 산 사람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 외롭다.


까뮈가 말했다. 부조리한 세계에서는 ‘더 잘사는 것’보다는 ‘더 많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말이에요. 한 인간의 도덕과 가치 체계는 축적된 경험의 양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현대의 상황은 대다수의 인간에게 같은 양과 같은 깊이의 경험만을 부여한다. 경험이 좀 더 많아지면 가치의 목록이 달라질 것이다.


사방이 아주 고용하면 예민해지는 게 아니라 둔한 방심 상태가 된다. 그런 방심 상태가 되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띈다. ‘존재’만 하던 것들이 슬며시 자기를 드러낸다. 의미라는 것도 그럴지 모른다. 절망이나 깊은 슬픔으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면, 현실적 의미들이 사라진 곳에서 다른 차원의 의미가 올라온다. 자각은 갑작스러워야 자각이다.


인생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나 구차한 허영, 아내를 실망하게 한 다른 큰일은 말할 것 없지만, 순간적으로 목이 메게 하는 기억은 이처럼 작은 일이다.(134쪽)  

가난은 오히려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내면에 담담한 자부심이 있으면 가난한 생활이 쓸쓸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못난 자의식으로 늘 세상과 대결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속물스러운 사람들을 경멸하며 의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초조해하며 나에게 없는 것들을 욕망했다. 아내의 인생도 그런 나를 고단하게 지켜보는 것으로 소진되었다.(182쪽) 

 마음은 슬픈데 쓸쓸하지는 않다(191쪽) 

 때로, 인생 전체가 아니라 삶의 어느 한 국면, 무엇을 견디거나, 넘어서거나, 혼자 걸어가는 어느 장면이 한순간에 전폭적으로 이해될 때가 있다. 그 사람 영혼의 한 자락이 들여다보인다고나 할까. 

(210쪽) 빛은/조금이었어 // 아주/조금이었지 // 그래도 그게/빛이었거든(230쪽)  

중요한 건, 내가 아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모호하게 사족 붙이지 않고, 부질없는 미문에 매달리지 않고, 내가 아는 표정과 몸짓들에 대해서만, 내가 명백히 아는 이야기만 쓴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는 말들을 내가 정확히 받아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내가 쓰는 글은 '내가 아는 세계'라는 한 의미가 된다. 그것이면 된다.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면 거기에 다른 이들도 보인다. 배역이 다를 뿐 모든 사람의 욕망과 상처는 본질적으로 같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무게의 삶을 산다. (237쪽) 

사랑은 하나의 시련이다.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 외롭다.(249쪽)  

 아이는 그때 자기 생을 유예시키고 있었다. 아무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늘 혼자였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기 인생에 무슨 일인가 생겨주기만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온순했다. 세상은 온순한 사람은 기억하지 않는다.(281쪽) 

바람이 불었다. 목련 나무의 가지와 잎들이 후두두 흔들렸다. 수십 개의 나뭇잎들이 저마다의 몸짓과 표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뭇잎의 미세한 떨림, 그 파동 하나하나가 내 몸에 날아 들어왔다. 서서히 벅찬 감흥이 가슴에 차올랐다. 나뭇잎은 저마다 하나의 웃음이고, 뜀박질이고, 눈물이고, 기도였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욕망이고 회한이었다. 살아오면서 문득 마주치곤 했으나 알 수 없었던 신비한 순간들이, 들판에 퍼져 나가는 종소리처럼 나뭇잎들 하나하나에서 무수하게 솟구치고, 몰려오고, 날아다녔다.(288쪽) 

 당신은 지금 어디 있냐고, 아내는 그렇게 나를 긴장시켰다. 이 소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설 청탁 끊긴 지 오래고 전직 소설가라는 농담을 덤덤하게 듣던 시절이다. 이번 소설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다.(293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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