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하고 그는 어둠 속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설득했다. 이 어마어마한 쓰레기의 퇴적층 위, 온갖 오물과 증오와 버려진 꿈들을 발 아래에 두고 저 까마득한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23평짜리의 내 보금자리를 향해 -182쪽
문득 신혜는 그 회색 점퍼의 사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천형사였다. 그녀가 경악한 것은 새삼스럽게 그에게 당했던 끔찍한 고통이 떠올라서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 눈앞에 보이는 그가 너무나 사람 좋고 순박해 보인다는 사실때문이었다.얼굴에 굵은 주름을 잡은 채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그 선량하고 꾸밈없는 웃음. 그녀는 그것을 도저히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주여.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