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그림자.
벽이 높이 솟은 마을과, 마을 바깥의 세상.
나의 무의식이 강하게 잡아끄는 세계와
나의 몸이 놓인 현실 세계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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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저마다 견고한 벽으로 쌓아 올린 마을이 있다.
마을은 말하자면 한때 강렬하게 이끌려 내 마음 깊숙이 새겨져 버린 가공의 유토피아, 달리 말하자면 도피처. 그런데 이 마을에서 지내자면 나의 그림자와는 헤어져야 한다. 유토피아에서 굳이 그림자를 데리고 다니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이유는 없으니 당연한 흐름이다. 내가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마을 바깥으로 내몰린 나의 그림자는 나의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지내는 나와,
마을 바깥의 또 다른 나의 분신.
그런데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내가 혹시 ‘그림자’인 건 아닐까?
하여 우리는 때때로 나 자신이 진짜 나인지,
그저 하나의 페르소나에 지나지 않는지
스스로도 헷갈리곤 하지 않던가.
문장은 어렵지 않게 읽히면서 때로는 찬란하기까지 하고,
치밀한 서술 덕분에 각각의 사건은 언뜻 명확한 듯 보이지만,
다 읽고 전체를 바라보면 무척 관념적이어서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게 하루키 소설의 강력한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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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작품 중반부 이후를 따라가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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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 된 현실 세계의 나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터를 잡았고,
벽에 둘러싸인 마을에 가보았다는 도서관장과 교류하고(다만 그는 이미 죽은 존재다),
벽에 둘러싸인 마을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는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을 만났다.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났다. 여자를 만나며 열일곱 시절에 만난 열여섯 소녀를 다시금 강렬히 떠올린다.
나는 결국 소녀가 만들어 내고 내가 완성한 가공의 세계(벽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회귀한다.
나만의 유토피아가 실존함을 굳게 믿고 싶었고(feat. 죽은 도서관장)
나만의 유토피아가 실존함을 증명해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feat. 노란 잠수함 소년) 나는,
열여섯 소녀가 그리워서 다시 벽에 둘러싸인 마을로 회귀해 버린 중년의 나는,
나만의 유토피아가 실존함을 증명해 준 노란 잠수함 파카 소년이 마을로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비로소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떠나 현실 세계로 나아가기로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