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나의 세계사 점수는 형편없었다.
필기를 아무리 꼼꼼히 하고 도표로 그려봐도 게르만족이니 투르크족이니, 무슨 제국에 무슨 황제가 어쩌고저쩌고, 아우구스투스 1세가 어쩌고 2세가 저쩌고. 정신 바짝 차리려 버둥거려도 쉴 새 없이 들이치는 낯선 고유명사의 거센 물살에 속절없이 휩슬려 떠내려가는 것 같았달까. 돌이켜보면 수업 도중에 그렇게 졸았던 과목도 없다.
그러나 나이라는 것을 먹으면서 나의 세계사에 관한 미천한 교양도 점차 깊이를 더해
왔는가 하면 전혀 아니다.
취업 한답시고 미친듯이 판 한국사능력시험 덕분에 한반도에 터를 잡은 여러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동일 시간 선상에서 이해하는 데까진 어떻게 성공했는데, 세계사에 관해서는 여전히 낯선 고유명사들이 머릿속을 정신없이 날아다닐 뿐이다.
그래도 세계사 초반에 힘 주어 배운 몇몇 단어들은 제법 친근하다. 이를테면 직접민주제를 실시한 고대 도시 국가 아테네. 그리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때의 그 로마...? 이탈리아에 로마가 있다는 건 아니까, 콜로세움이 있는 로마도 대충 아는...건가?
《유럽 도시 기행 1》은 비교적 친근한 도시인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가 겪은 세월을 상징적인 건축물을 중심으로 풀어간 덕에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수월했다. 그 쾌감을 기대하고서 《유럽 도시 기행 2》를 펼친 건데. 몇 장 읽다 보니 나의 미천한 배경지식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메워나가면 좋을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세계사가 드넓게 펼쳐졌다. 이를 테면 이런 거다.
11세기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 지방의 어떤 귀족이 합스부르크라는 성을 지었다. 그때만 해도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시골 귀족이었을 뿐인데, 2백 년쯤 지났을 때 후손 한 사람이 독일 지역 봉건영주들의 왕으로 뽑혔고 그 아들이 오스트리아 영지를 물려받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주로 혼인을 통해 보헤미아, 헝가리, 스위스 티롤,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손에 넣었고 15세기 중반부터 3백여 년 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위를 대물림했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문화예술을 후원해 이름을 떨쳤던 메디치 가문조차 한낱... (생략)
《유럽 도시 기행 2》 p.25
한 번 지나온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음, 그래...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하고 갸웃.
세계사에 훤한 사람이라면 저자가 해주는 이야기가 친절하게 와닿을 것도 같은데. 아쉽게도 나에겐 아니었다. 책을 읽는 이틀 동안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으나 많이 낯선 고유명사의 거센 물살에 (다시금) 휩쓸렸다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래도 백지 같은 머리에 밑그림이라도 흐릿하게 그리는 셈 치고 문장과 문단을 나름 정성껏 읽었다. 어딘가에서 주워 들은 단어들이 집중력 흐트러질 때마다 등장해 주었고, 작가가 들려주는 세계사 이외의 이야기들 덕에 흥미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완독 후 머리에는 책 내용을 따라가며 검색해본 몇몇 역사적 인물들의 이미지가 남았고,
마음에는 저자의 인간에 대한 묘사 몇 문장이 남았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기념탑 '페스트조일레'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누가 페스트를 물리쳤는지 우리는 안다. 공중보건 전문가, 행정가, 건축가, 의사와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의 분투와 지성과 헌신 덕분에 인류는 전염병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3백 년 전의 빈 시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치명적 전염병을 견디는 일이 얼마나 끔찍했겠는가. 기도의 힘이 모자라서 신의 가호가 내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세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없어서 비극을 막지 못했다. 30여 년 후 페스트가 또다시 덮쳤을 때 빈의 방역 담당 관리들과 의사들은 첫 번째 대유행 때 저질렀던 오류를 되새기면서 적극 대처해 피해 규모를 크게 줄였다. 비를 맞고 선 페스트조일레를 보면서 그들을 생각했다. 인간은 얼마나 무지하며 무력한가. 그러면서도 또 얼마나 지혜로우며 용감한가. 삶은 때로 얼마나 허망하며 또 얼마나 질긴 것인가.
《유럽 도시 기행 2》 p.32
무지하고 무력하지만 용감하고 지혜롭기도 한 인간.
어찌 보면 허망하기도 질기기도 한 삶.
비단 페스트 앞에서만의 이야기일까.
삶의 여러 장면에서 곱씹어 볼 만한 표현인 것 같아서,
어쩌면 이 글귀에 힘을 얻을 날도 있을 것만 같아서 필사 노트에 고스란히 옮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