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간첩이 기소됐다. 간첩의 범죄 사실을 기록한 검찰의 공소장은 94쪽에 달했다.
업무상, 공소장을 챙겨 찬찬히 읽다보니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이 겹치기 시작했다.
소설은 남파된지 20년이 넘은 잊혀진 스파이 김기영과 그 가족을 등장시킨다. 마치 TV시리즈 '24'처럼 긴박한 그들의 24시간이 소설 전체다.
대략 소설을 보자.....평양외국어대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1980년 남파간첩으로 차출된 주인공은 김일성정치군사대학에서 4년간 대남공작원 교육을 받고 김기영이라는 신분으로 남한에 침투한다. 자연스러운 운동권으로 출발하기 위해 입시를 치르고 연세대 수학과 86학번이 된 주인공. 주체사상 학습하면서 대학다니다가 졸업 후에는 영화 수입업자로 생업을 삼는다. 하지만 1995년 자신을 내려보낸 북쪽 담당자가 숙청되면서 '명령'이 끊기고...잊혀진 스파이는 남한의 소시민으로 녹아든다....이런 김기영에게 돌연 귀환명령이 떨어진 어느 하루..가 바로 이 소설이다.
소설의 김기영이나 이번에 기소된 간첩 정경학의 운명은 묘하게 닮았다. 처음엔 방글라데시인으로 변신하려다 태국인으로 살았고, 중국인 행세도 하다가 필리핀인 행세까지 했던 비자발적 노마드 정경학. 김기영처럼 남한에 직파된건 아니지만 그도 중간에 북쪽 담당자가 숙청되면서 당혹스러운 처지에 놓인다.
간첩들에게 드물지 않게 벌어진 상황 같은데....태국에서 활동하던 정경학은 97년 태국 금융위기로 사업이 힘들어지자 북한 복귀를 희망하게 된다. 계속 베이징 쪽으로 전문을 보내는데..회신이 없자 '남조선에 나가 변절됐다고 보고 통신을 단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불안에 떨고..직접 확인해보겠답시고 베이징으로 간다.
그런데 "문화연락실 직원이다"라고 상사를 찾자 "문화연락실은 없다. 대기하라"는 대답이 나온다. 결국 정씨는 "문화연락실은 범죄자 집단으로 보위사령부에서 모두 처리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경위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대답과 함께 여러가지 조사를 받았다.
신분노출에 대한 불안에 떨고, 북한의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며..한번 들어가게 해달라던 그는 철저히 소외됐다. 간첩 생리상 달랑 선 하나만 대고 있던 조직이 '범죄자 집단'이 되어버린 현실이었고, "평양에 들어가야 좋을 일이 없다"는 싸늘한 대답뿐이다.
16살에 김일성 종합대 외국어문학부에 입학, 18세에 특수부대 '적공국'에 입대했고, 적공국 특수공작대 공작원 자격으로 20살에 김일성 정치대학에 들어가고 21살에 노동당 당원이 되고....최고 엘리트로 교육받았으나...그의 삶은 신산하다.
남한에 침투해서 청와대 분수 앞에서 사진 한방 찍어보려고 애썼는데....무장한 경비병만 보고 그냥 쫄아서 포기한 사례..등 실상 관광객이 사진 찍는게 뭐 대수겠냐만...지레 소심하게 포기한것도 많다. 소설속 김기영도...슈퍼마켓에서 물건살 때 뭐라고 말해야 하나부터 훈련받고, 롯데리아 앞에서 '셀프서비스'가 뭘까 몇시간을 고민한다.
진부한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고통.
모처럼, 김영하스럽지 않은 김영하의 장편. 어쩐지 비현실적인, 우리네 일상과 거리가 먼 간첩을 소재로 했는데...마침 간첩 공소장을 접한 나로서는 작품의 리얼함에 소름이 돋았다. 작가의 취재가 허투루 진행된게 아닌가 보다. 분단국가 어느 구석엔가 이 비슷한 스토리가 여럿 있을법도 하다.
처음 책을 읽을 땐...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지만, 공소장을 읽으면서 이 작품은 내게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김기영의 아내 장마리나 딸래미의 이야기 등 등장인물 모두가 쿵쿵 심장박동 소리를 내고 있지만 적어도 내게 이 작품은 2006년 체포된 어느 간첩의 사연과 떨어지지 못할거 같다.
북한은 어제 핵실험을 강행했다. 2006년 한반도는 이렇게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모여 현실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