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만 보는 바보가 살고 있습니다.
  • 오후의 마지막 잔디
  • 무라카미 하루키
  • 13,500원 (10%750)
  • 2026-04-23
  • : 12,660

책장을 여는 순간 낯이 익었다. 책날개에 익숙한 작가와 그린이 소개를 보는데 너무 익숙했다. 그제야 책 제목을 다시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내 블로그를 검색했다. 분명, 이 책의 단행본은 없어서 신간인 줄 알고 구입했는데, 검색결과에 『중국행 슬로보트』 단편집에 실려 있던 작품이었다. 이미 읽은 책을 또 구입한 모양이었지만 안자이 미즈마루가 오로지 이 소설을 위해 20편의 일러스트를 실어 따로 출간한 책이라고 하니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안자이 미즈마루의 타계 10주년을 맞아(2024년) 온전한 한 권의 책이 탄생했으니 그것 또한 기념일 것 같다.

서서히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5월에 이 책을 읽으니 아직은 무덥고, 땀이 뻘뻘 난다기 보고 잔디를 깎는 장면이 싱그러워 보였다. 아직 나를 덮치지 않는 더위 때문인지 반듯하고 가지런히 잘려 나가는 잔디를 상상하며 오로지 푸르름만 떠올렸다.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 특유의 시니컬함과 딱히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인물의 내면과 생각의 파편들에 깊게 다가가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인식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이 잔디 깎는 일을 그만 두었을 때, 한낮의 꿈처럼 내 기억속에서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연인과 여행을 가려고 시작한 아르바이트였지만 헤어지자는 연인의 편지가 도착하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계속 하게 된 잔디 깎는 일은 주인공에게 적격이었다. 가장 먼 거리의 집을 택해서 느긋하고 꼼꼼하게 잔디를 깎는 과정은 단순하지만 의식을 치르듯 행해진다. 당연히 고객들 입장에서는 평이 좋을 수밖에 없고, 사장은 이 일을 오래 하길 바라지만 주인공은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야 했고, 또한 딱히 돈을 벌어야 할 목적도 상실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집의 에피소드는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일을 하면서 툭툭 튀어나오는 헤어진 연인과의 기억들 또한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연인과의 잠자리가 기억나다가도, 잔디 깎는 일을 하면서 딱 한 번 갖게 된 그 집 부인과의 잠자리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잔디 깎는 일이 주인공을 지탱해 준다는 느낌까지 사라지게 했다. 오로지 나의 기준으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과 ‘다른 표현은 없을까?’라는 생각이 지배할 때 철저히 관찰자가 된다. 어떤 작품은 깊이 몰입하다가도 무언가 나와 결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작품에서 한 발 짝 튕겨 나온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느끼는 감정이었는데, 다시 읽으니 그 기억들이 솟아났다.

이런 감정을 ‘나쁘다’, ‘옳다’라고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분명 오래전에는 불쾌감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쓰는 작가는 내가 아니므로 가타부타 끼어들 수 없기에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내가 예견한 길에서 곁길로 빠져나가는 이야기의 흐름과 주인공의 행동들이 어쩔 수 없다고 말이다. 40대 중반을 살면서 내 뜻대로 되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소설 하나도 맘 편히 읽을 수 없다는 피로함이 몰려오다가도, 어쩌면 저자는 인간 내면의 이런 복잡하고 숨기고픈 감정을(나만 숨기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을 빌려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마주치고 싶지 않는 장면들과 표현들을 마주하면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불쾌한 감정을 지나, 솔직한 감정의 표현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저 받아들이게 된다. 마지막 집에서의 그 평범하지 않는 상황들처럼 말이다. 첫 만남에서 여주인의 담배 요구, 술을 건네주고, 맘에 들게 깎인 잔디를 보며 죽은 남편을 떠올리다가 먹을 것을 챙겨주며, 보여 줄게 있다며 자신의 딸의 방을 보여주며 성격을 물어보고, 마지막에 팁을 받는 그 모든 과정들을 그저 받아들이게 된다. 분명 소설을 읽으면서 서걱거리던 낯섦들이 내 일상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종종 일반적이지 않는 요구를 하거나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럴 때 격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주인공처럼 무덤덤하게 그 상황에 그저 최선을 다 한다. 그리고 나서 되짚어 봤을 때, ‘그럴 수도 있지 뭐!’하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상황들이 많다. 이 이야기도 헤어진 연인과 잔디 깎는 일, 그리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흘러가는데, 일부분만 보며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굳이 판단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주인공처럼, 그저 일상의 흐름이라고 여기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일상이 쌓여 한 사람의 자아가 만들어 지겠지만 그 자아 또한 이러면 어떠하며, 저러며 어떠하리. 그저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오후에 마지막 잔디 깎는 일을 들여다 본 것일 뿐이다.

​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