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설명을 통해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가 기원으로서의 신의 관념이 아니라, 관념이라는 것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틀이라는 의미가 더 명확히 다가왔다. 재미있는 설명이었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 대상이 우리를 자극해서 관념이 생겼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내가 눈앞의 컵을 인식한다. 컵이라는 물체/대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컵이라는 대상이 여기 있으니까. 컵이라는 대상이 촉발돼서 내가 이것을 지각한 것. 그렇다면 컵이라는 대상이 원인이 될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은 ‘컵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는 말은 신의 관념이 기원이라든가 최초의 원인이라든가 시원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관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틀이라는 이야기다. 신의 관념으로 인해 모든 관념이 가능하다. 신의 관념을 통해 모든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의 관념 없이는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인식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2. 알튀세르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몰랐지만, 강의 첫 시간부터 거칠게 말하자면 시치미를 뚝 떼고 약간 의뭉스럽게 ”신“을 가져다 쓰는 스피노자의 방식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스피노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에티카 1부를 하나하나 따라가다가 어떤 정리나 문장들은 차후에 신학자들에게 먹일 한 방을 위한 밑밥들처럼 느껴져서, 참으로 밑밥도 촘촘히 깔아놓으시네 진짜 못 당하겠다 싶어 혼자 웃은 적도 있었다. <에티카> 초반부는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면서도 정밀하고 신랄하면서도 우아한 블랙코메디 아닐까. 더글러스 애덤스의 근대 철학자 버전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 덕에 혹은 그 탓에 유난히 스피노자는 오해를 많이 받는 철학자인 것 같다.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 스피노자를 교조주의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고, 신을 초월적 영역에 놓고 생각하는 범신론자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몇 년 전에 A가 ”B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가 스피노자다“라고 한 걸 듣고 사람들이 B가 의외로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오해했었던 것도 생각나고. 지금도 얼핏얼핏 스피노자에 대해 묻거나 찾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가 신을 찬양하고 신 안에서 은총과 평안을 얻어 지구 종말의 그 날에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온건한 사람 정도의 느낌으로 알고 있다. 누구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과격(?)했던 사람인데.
나도 스피노자를 오랫동안 오해했었다. 내가 읽었던 책들에 언뜻언뜻 나오는 스피노자 인용구들을 보면 그는 너무나 구조주의자고 너무나 유물론자로 보였던 것. 이 오랜 오해가 풀린 건 주디스 버틀러 세미나에서였다. 그 세미나가 아니었으면 스피노자 <에티카>를 강독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고 나는 평생 그가 구조주의자 아니면 유물론자라고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심지어 에티카 1부 강의 중반까지도 나는 그런 틀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적진 속에 들어가서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 적을 내파하는 것. 사실 메갈에서 썼던 미러링이 일종의 이런 방식인 건데 그 판의 성격과 미러링 하는 대상의 성격과 수준 때문에 메갈의 미러링은 혐오발언 문제와 겹치며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었지만(여기에 대해서 나는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발언>에 대체로 동의한다. 물론 ”언어의 상처에 저항하는 언어들은 상처를 재실행하지 않고서 그 상처를 되풀이해야 한다.“라는 게 현실적으로, 특히 물리적 위협과 연결되었을 때 어디까지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스피노자식으로 마무리해서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ㅋㅋ),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우는 것은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기기에는 매우 효율적인 것 같다. 어쨌거나 10년 동안 ”보이지 않는 것“이었던 페미니즘 이슈를 ”보이는 것“으로 리부트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굉장한 위력이었던 것. 미러링 그 이후-(”그 이후“에 이미 찍어야할 마침표가 들어가 있지만 사실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에 대해 더욱 같이 고민해야겠지만.
아무튼 적진에 들어가서 적의 언어로 적을 해체하는 스피노자 멋있어. ”너희가 말하는 그런 신 따위 없어!“라는 외침을 이렇게 길고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게 쓰고 있는 걸 본다는 것.
* 스피노자는 왜 ‘자연법칙’이라고 쓰지 않고 ‘신’이라고 썼을까.
스피노자가 기독교신학적인 용어법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두고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적인 게릴라 전술이다“라고 말했다ㅋㅋㅋ 적진에 들어가서 적으로 단장하고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운다. 만약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자연법칙’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어휘를 갖고 이야기했으면, 스피노자 적수들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쟤하고 나는 어차피 노선이 다르니까, 쟤는 아예 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니까 각자 갈길 가자. 그런데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신이 무한하시고, 신이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하고, 마치 교조적인 독실한 신자인 것처럼, 아주 철저한 신학적인 어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학하고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적의 진지 속에 들어가서 파괴하는.
3. 자크알랭 밀레가 스피노자의 용어법을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개념에 적용했고, 저 적용이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이나믹하게 만들었는지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은 여의치 않다. 언젠가 만약 내가 구조주의를 공부하게 된다면 그때 풀 숙제로 남겨 두기로.
자크알랭 밀레는 60년대에 이런 개념을 쓴다. 구조의 작용/ 구조의 행위. 구조화하는 작용/ 구조화되는 작용. 스피노자의 철학의 용어법, 산출하는 자연-산출되는 자연을 가지고 와서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 개념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인과 결과가 들어가면서 가령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이 굉장히 다이나믹해진다. 60년대에 이런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전에는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1960년대-70년대 프랑스 철학에 굉장히 중요한 사상적인 원천을 준 것이 스피노자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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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유명한 2부 정리7을 들어가는 날, 강의 시작 전에 어쩐지 폭풍전야같은 고요한 긴장이 내 마음에서 느껴졌다ㅋㅋ 자세히 파고들자면 한 달은 다뤄야할 정리7에서 기본적으로 꼭 알고 넘어갈 것만 뽑아서 설명해주신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걱정했던 것보다는 매우 명료하게 다가왔고 그 이전 정리들에서 ”구름 사이로 보듯이“ 막연하게 보였던 어떤 의문들도 같이 또렷해졌다. 들뢰즈의 3중 평행성을 찾아 읽은 게 이해를 돕는 데에 한 몫 했다. 무엇보다 정리7이 좀 더 깊게 다가왔던 것은 선생님의 이 표현 때문이었는데, 내가 언젠가의 스피노자 일기에도 썼었던,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이면 표본이 너무 작지 않은가라는 의문. 지울 수 없었던 의문이었는데 이날 마침 선생님이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정리7이다“라고 했을 때 정리7이 좀 굉장하게 느껴졌다. 저 정리7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입장의 상당부분을 결정할 것 같은 느낌. 그러니까 결정적 모멘트 같은. 그 이전에도 여러 논쟁적이고 당대 및 후대 철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던 마치 스피노자의 선언 같은 정리들이 있었는데도 나에게는 정리7이 그 무엇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커다란 세계를 결정짓는 최종 결제 도장 같은.
들뢰즈의 3중의 평행성
1) 양태들의 평행성 (관념과 그 대상(가령 물체)의 평행성) <- 이것이 평행한 이유는 2)
2) 속성들의 동등성/상동성 (사유속성, 연장속성...) <- 이것이 동등/상동하는 이유는 3)
3) 존재의 동일성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5. 정리7의 주석을 보면서 스피노자가 <정신교정론>에서 했던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 같이 생각났다. 수업을 듣기 전인 과거의 나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싶다.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와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모순이게 아니게? 분명 ”모순이지!“라고 대답했을 것이다ㅋㅋ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바로 이 점인 듯하다.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즉,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6.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세 가지 모델을 통한 설명과, 거기에 페히너가 덧붙인 네 번째 모델, 스피노자의 방식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페히너의 방식을 두고 수업시간에 다른 분들이 억지 같다고 했지만, 선생님도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아마도 ‘떨어져있는’에 방점이 찍히는)가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지만, 그래도 페히너의 의도가 매우 명료하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이 비유를 최대한 살려주고 싶어서 잠깐 생각 해봤는데. 그럼 하나의 커다란 몸체에 두 개의 시계가 나란히 붙어있으면서 같은 매커니즘으로 움직이는, 몸체에 달려있는 태엽과 초침을 움직이는 힘이 양쪽에 매달려있는 두 개의 시계에 동시에 작용하니까 같은 질서와 연관으로 움직이게 되는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을까? 이 시계라면 두 개의 다른 시계이기도 하면서 하나의 같은 시계이기도 한, 두 개의 시계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하나의 시계라고(가게에서 저런 모양의 시계를 산다고 했을 때 분명 ”저거 ‘하나’ 주세요“라고 말할 테니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도 역시 억지고 무리일까?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해서 서로 독립적인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시계의 비유를 든다. 라이프니츠가 1695년에 짧은 글을 하나 쓰는데, 그 중 하나가 <실체들 사이의 소통에 관한 새로운 체계>. 정신이라는 실체, 신체라는 실체 사이에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일치가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두고 여러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니까 거기에 반해서 라이프니츠가 몇 차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해명을 쓰는데, 그 중 하나의 해명이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동일한 두 개의 시계는 평행성에 대한 비유다. 하나의 시계는 관념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다른 시계는 사물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이 시계가 똑같은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은 상응한다는 이야기.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모델이 있다.
1)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동하여 작용하게 만드는 방식. (데카르트주의)
하나의 시계가 작동하면 다른 시계도 따라서 작동하도록 연결을 만들어놓은 시계
2) 두 개의 좋지 못한 시계가 서로 항상 일치하게 만드는 길은, 능력 있는 시계공이 두 시계를 조정해서 그들이 매 순간마다 서로 일치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 이것은 니콜라 말브랑슈가 제시한 것이다. 17세기의 프랑스의 사제이며, 포스트 데카르트주의자라고 불리는.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노선은 조금 다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occasionalism 기회원인론. 왜 ‘기회’라는 말을 썼냐면, 예를 들어 내가 손을 든다고 하면 그에게는 내가 손을 드는 것이 하나의 occasional, 내가 손을 들 때,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 자신이 원인이 돼서 손을 든 것도 아니고, 나로 하여금 신이 손을 들게 하도록 원인으로서 작용을 미친 것이다, 라는 의미다. 어떤 기회에 어떤 작용이나 사건, 어떤 행위가 일어나면 그 모든 것의 진정한 원인은 신이라는 것이 기회원인론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굉장히 재미있다. 마치 구조주의 같은 느낌. 이 두 번째 방식은 기회원인론적 방식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두 개의 별로 좋지 못한, 자꾸 느려지거나 해서 오차가 나는 시계는 방향이 안 맞을게 분명한데, 이 두 시계의 방향이 계속 일치하도록 아주 능력이 뛰어난 시계장인이 매 순간마다 두 시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 때 신이 나를 통해 작용하듯이 시계에도 매번 시계공이 작용해서 시간을 일치시키는 것. 엄청 바쁘겠죠ㅋㅋㅋ
*** 말브랑슈 malebranche: 기회원인론 occasionalism
- 유한한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사물들이 행위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다. 내가 이렇게 손을 든다면, 내가 손을 드는 이것이 바로 오케이션, 이 기회의 원인이 신이다. 말브랑슈 철학에서는 개인과 개체는 꼭두각시다. 신에 의해 규정되어 움직이는. 하지만 생각보다 미묘하다. 손을 드는 원인은 신인데, 말브랑슈 이야기는 이 근육의 운동,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팔근육의 작용방식, 그러니까 팔을 들 때 근육이 이완되고 팽창되고 하는 방식, 이것을 신이 정해놓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신체를 규정하는 생리학적인 법칙. 즉, 내가 움직이는 것은 임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규정하는 근육의 운동 패턴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3) 두 시계를 처음부터 대단한 기술과 정교함으로 제작하여 그것들이 이후에 서로 일치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방식.
- 이게 라이프니츠 자신이 제시하는 방식이다. 예정조합. 아주 완벽하게 만들어서 알아서 둘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설명에 제일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했을까?
19세기 후반 독일의 아주 유명한 학자 게오르그 페히너 georg fechner는, psychophysics라는 학문을 만든 사람이다. 심리물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개척한 사람. 오늘날식으로 말하면 뇌과학? 신경생리학? 같은 것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사람이다. 프로이트 초기저작에서 페히너에 대해 얼마나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지를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심리물리학. 그냥 psychology도 아니고 physics도 아니고 psychophysics 학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ㅋㅋㅋ 이 결합된 이름 자체가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일치하는, 이것을 통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parallelism을 가지고 온다. 평행성, 평행론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심리물리학에 저것의 기본원리들을 채택했다. 심리적인 사건과 신체적인 사건이 일치하는 이유, 그 매커니즘을 밝히려는 학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 이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이렇게 언급한다.
라이프니츠는 세 개의 방식만 이야기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방식들 이외에 네 번째 방식이 있다. 그 네 번째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페히너의 답은 ”두 개의 시계가 사실은 하나다“ ”두 개의 동떨어진 시계가 아니라 하나의 같은 시계다“, 그러니 당연히 시계가 일치한다. 이게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페히너의 취지는 이해가능 하지만, 사실 이게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스피노자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정신과 신체의 관계,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라는 모델이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가 여기에 스피노자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뭔가 스피노자의 철학,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설명이 자기 모델에 맞지 않고 부적절해서였을 수도 있다.
7.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스피노자와의 대비로서 잠깐씩 접할 뿐이지만, 그럴 때마다 받는 인상은, 조금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의 세계는 어쩐지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아무 것도 없는 “무”라는 상태도 존재와 대등한 것이라며 던졌던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그의 질문도 그렇고, 관념이 어떻게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정신을 굉장히 내면화되고 사적인 것으로 여기며 이런 개별적인 정신과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던지는 질문도 그렇다. 나에게 그의 철학적 세계는 어쩐지 (신을 향해서든 스피노자에 대해서든) 구애적이고 다소 맹목적이고 따뜻하고 의리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병약하고 나이브한 소년의 그것 같은 느낌이다. 그에 비해 스피노자는 매우 냉정하고 단호하면서 이성적이고 강건한 느낌(물론 이건 아무 근거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비평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대체적으로 로맨틱하고 나이브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지ㅋㅋㅋㅋ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을 보기 전에는 스피노자의 관념론에 개별적인 정신,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정신만 존재하고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깨닫지 못한 건 아니다.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물성이 있는 어떤 것, 그러니까 계량이 가능하고 법칙화가 가능한 어떤 것으로 본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면에 숨어있는 뜻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정신”만“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당연히 정신을, 선생님 표현을 빌면, public한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은 당연히 public한 것이고 사물 같은 것이고 계량화할 수 있고 법칙화 할 수 있고 보편적이고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좀 더 거칠게 말해 개개인마다 갖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어떤 ‘결여’가 있다는 것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을 접할 때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때 외부 자극을 받았을 때 사람마다 갖는 감정 느낌 기억들은 다 다르고 그것대로 특별하겠지만, 그것들을 외부로 끄집어내어 죽 늘어놨을 때(그렇다, 나는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그걸 건져낼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면 ‘정신’을 외재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해독해낼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문제제기를 한 것을 보고나서야 아,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구나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자기 자신, 혹은 인간이라는 종의 어떤 내면이나 정신을 유달리 특별하고 내밀하고 굉장히 사적이며 조금 중2중2한 표현을 빌면 ”아무도 내 마음 알 수 없어“ ”나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어“라고 여기는 유형의 사람을 매우 피곤해하는 편인데 이런 상태를 뜻하는 ”창문이 없는“이라는 표현이 무척 좋았다.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지상을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창문으로 그 안을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데, 집 안에 있는 사람만이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한 번도 보지 않는 바람에 자신의 집에 창문이 달려있는 줄 전혀 모르는. 그래서 아무도 이 집 안을, 집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혹은 ‘나’니까 나의 정신이나 내면 안에 무언가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특별함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고, 나의 감정은 특별한 어떤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기에 스피노자에게 납득하지 못하는 라이프니츠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관념은 사물이나 마찬가지라고 확 깨부수어 버리는 스피노자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참 무자비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정신, 나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다 못해 어떤 특출한 정신과의사도 믿지 못하고 의사들이 몇 번의 상담, 백 마디도 안 되는 말들 속에서 나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알 수 있냐며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한다거나,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혼자 피해의식의 집을 쌓고 그 안으로 자꾸 들어가 버린다거나(아마도 그 집은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일 것이다), 아집 속에서 듣기 좋은 말,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는 것은 더 무자비한 일이다..
나는 관념을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독자적인 사물,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스피노자 철학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마음에 든다.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있다“는 말도 무척 좋다. 이런 점들이 시사하는 바를 라이프니츠의 비판 덕에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즉,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8. 나에게는 ‘에티카 질문노트’가 있다. 수업을 듣다가 질문이 생기면 적어두는 노트인데 바로바로 질문하지 않고 노트에 적는 이유는 나중에 가면 그 답이 나오겠지 싶어서다. 이미 그런 경우가 제법 있었어서 현재까지 나의 질문노트에 적혔던 23개의 질문 중에서 11개가 지워지고 12개 남아있다. 이번에 지웠던 열한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들에 비해 우월한 속성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강의에서 그 답을 들었다. 물론 스피노자가 직접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스피노자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 담긴 답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 답을 듣는 순간 너무나 납득했고 조금 감동했다. “어차피 무한한데.” 아 너무나 논리적이면서 근사한 답 아닌가. 어차피 무한한데 무한한 것에 400을 곱하나 10000000을 곱하나 무슨 상관이야, 진짜. 스피노자에게는 시간조차도 아무 의미 없는 개념인데. “무한”이라는 가늠도 상상도 제대로 해볼 수 없는 커다란 세계에서 사유속성이 연장속성보다 더 양이 많네 적네 따지는 것이 정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12가지 색 물감 중에 보라색이 특권을 얻어 다른 색깔 물감보다 600000배의 양으로 물에 풀어진다고 한들 바다 색깔에는 변함없다.
*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A속성에서는 a가 따라나오고 B속성에서는 b가 따라나오고 연장속성에서는 물체가 따라나오고, 사유속성에서는 관념이 따라 나오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속성들은 동등하다. 그런데 우리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생각해 보면, 저기서 물체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있을 테고, a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b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게다가 또 관념 자신에 대한 관념도 또 있을 것이다. 관념1에 대한 관념2, 관념2에 대한 관념3, 관념3에 대한 관념4..... 그리고 저 관념에 대한 관념은 분명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고, 관념이니까 다 사유속성에 속할 것이다. 게다가 관념1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이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보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즉,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다 있으니까 + 게다가 각각의 관념이 형상적 실재가 될 수 있다면 계속해서 관념에 대한 관념으로 배가가 될 수 있으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더 커지지 않는가. 이런 문제제기.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니, 어차피 무한한데...ㅋㅋㅋㅋ 무한 곱하기 9를 하나, 무한 곱하기 30000을 하나 다 무한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ㅋㅋ 1부 정리15의 주석에 무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무한 양을 가정한 것에서부터 이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누군가 직접 스피노자에게 저 질문을 던진다면 스피노자가 뭐라고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물체에는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지만 관념들의 경우에만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관념의 관념의 관념의.... 이게 생겨나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은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속성들 사이의 동등성, 평등 이런 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9.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정리로도 유명하고, 스피노자를 잘 모르던 시절에도 ‘평행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 유명한 정리7을 바짝 긴장하고 들었다가 정리8로 넘어가면서 조금 마음을 놓았는데, 웬걸. 의외로 정리8이 만만치가 않았다.
일단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과 마찬가지인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에티카에서 만났던 어떤 것들 중에서도 가장 생경하고 낯설었다. 형상적 실재성-표상적 실재성의 개념도 이렇게까지는 낯설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같이 한 가지 특성만 갖고 있는 걸 말한다고? 살면서 이런 류의 개체를 상상한 적이 없어서 낯선 걸까?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과장적인 비유로서 일상에서 들어본 적은 있다. 예를 들어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숨만 쉬는 사람“ ”밥만 축내는 사람“ ”잠만 자는 기계“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렇게 한 가지 특성만 갖고 있는,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이기만 한 것은 아닌(부분적인 진실이 있는) 존재에 대해 이렇게 유형화를 하고, 거기에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게 SF소설이 아니라 철학책, 그것도 스피노자 <에티카>의 정리에 등장을 한다고? 이 사실이 어쩐지 생경하고 어색해서 내가 이해를 제대로 한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했던 것이다. 재밌어ㅋㅋㅋ
따름정리도 재미있었다. 저 정리에서 놓쳐서는 안 될 키포인트인 글자는 ”만“인 것 같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은, 우리가 경험할 수도 없고 실존하는 개체로서 우리가 표상할 수도 없는 실재들이니까 오직 신의 무한지성 안에”만“ 존재한다는 의미고, 그렇기 때문에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나 관념들은 신의 무한지성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할 수 있고, 그것들을 유일하게 파악/포함하고 있는 신의 지성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들도 사라진다.
이어서 나오는 신의 속성 안에서 파악되고+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에 속하는 실재들은 정리8과는 다르게 시공간적인 개체성을 갖는, 아직 실존하지 않고 그게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정확히 모르지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스피노자의 우주가 무한한 우주라는 것을 배워왔지만 정리8과 정리9는 정말 뭔가 우주적이고 SF소설 같은 느낌이잖아? 하지만 나에게 아직 주석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면 주석에서 예로 든 원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선 이외에 존재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과 직사각형들은 나에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가 아니라 정리9의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원 안의 선이나 직사각형은 시공간적 개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이 그림 속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 내가 저 원 안에 당장 선 하나만 그어도 생겨날 수 있는, 어떤 개체 형태를 갖고 있는지 우리가 분명 알고 있는 것들로서의 실재 아닌가? 주석에서 이런 커다란 의문이 남은 채로 일단 강의가 끝났는데 다음 강의에서 정리8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으니 기다려봐야겠다.
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그렇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에는 뭐가 있을까. 우리는 2부 공리1에서 신/실체는 본질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원인과 다르게 인간은 본질상 실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본질과 실존 사이의 존재론적 괴리가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것들의 특징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사례로 생각되기 쉬운, 이를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아직 출시되지 않은 아이폰 13 같은 것들은 정리9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정리8의 따름정리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따름정리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고 있다. 1)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이게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것), 2)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것. 이때 ‘지속’이라는 것은 우리식으로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시공간적인 어떤 개채성을 갖고 있는 어떤 것이다. 아이폰13이라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아직 실존하고 있지 않지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보면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와는 다른 것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가령 인간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인간은 본질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특성들, 웃을 수 있다/직립할 수 있다 같은 득성들을 갖고 있다.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직립할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앉아있다는 특성만 갖고 있는 소크라테스” 같은 그런 것. 이런 것들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이것들은 “지속”을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 없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없고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같은 것. 그렇다고 이게 아주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말할 수 있는 특성”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갖고 있는 특성이니까. 그러니까 한 가지 특성으로만 파악된 독특한 실재,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 그렇다면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직립하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이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실존하는 개체로서 개별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오직 무한지성 안에만 있다는 그런 의미다.
-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이런 사례들을 든 이유는 그래야 정리8과 정리9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리8은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인 개체라고 상정할 수 있는 어떤 실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리8과 정리9는 구별되어야 하고, 정리8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현행적 실재라는 것은 아직 지속의 차원이 들어가지 않은, 구체적인 개체성을 갖지 않는 그런 독특한 실재다.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것.
- 스피노자의 주석을 보면 그림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예시하는 이 원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의 3권 정리35에 증명의 대상으로 나오는 도형이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을 가진 원. 스피노자는 여기서는 이렇게 두 개의 선만 존재하지만 이 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 또는 직사각형이 있을 수 있고, 그게 실존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실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