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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일상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ordo et connexio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증명 이는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원인지어진 것에 대한 관념은, 이것이 그 결과가 되는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현대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아주 분분한 중요한 정리. 자세히 파고들자면 한 달 동안 다뤄야할 정리이다

- 정리5: 관념에 대해서만. 관념/사유속성을 한정해서 이것들이 신을 원인으로 삼듯이-

- 정리6: 양태들(사유+연장+속성abc등등)도 실체로서의 신을 원인으로 삼고 있다. 사유속성은 사유속성으로 표현되는 실체로서의 신을 원인으로 삼고 있고 연장속성은 연장속성으로 표현되는 실체로서의 신을 원인으로 삼고 있고.

- 즉, 정리5가 사유속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정리6은 이것을 ”모든 것“으로 확장했다

- 정리6의 따름정리가 ”곧 사유의 양태들이 아닌 실재들의 형상적 존재가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이는 신이 실재들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준 바, 관념들이 사유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이 실재들이 그것들 자신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도출되기 때문이다.“ 정리7로 직결

 

* 주석을 보면 어떨 때는 질서만 언급하고 어떨 때는 연관만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왜 질서만이 아니고 연관만이 아니고 왜 ’질서와 연관‘이라고 했을까? 왜 이 문장에서만 질서와 연관인 걸까? 왜 ’질서나 연관‘이 아니고 ’질서와 연관‘인 걸까. (누가 편지로 질문 좀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 Martial Gueroult (1890-1974) 아주 중요한 주석서를 쓴 프랑스 철학사를 대표하는 마샬 게루. 그가 스피노자 윤리학에도 두 개의 주석서를 썼다. 1부에 대해 한 권(1968) 2부에 대해 한 권(1974). 사실 세 권으로 기획했는데 3권 서문만 쓰고 세상을 떠났다. 아마 3-4-5부는 한 권으로 묶어서 써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1권은 거의 600페이지가 넘고 2권은 더 두껍다. 마샬 게루가 질서와 연관에 대해 사변을 쓴 것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연관: 사물의 본질의 질서, 질서: 사물의 실존의 질서>를 표현한 것으로 연관이 질서보다 수준이 높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는 어디 있는가? 없다ㅋㅋㅋㅋ 딱히 근거가 없다. 어쨌든 스피노자가 서로 다른 단어를 쓰고 있으니까, 이것을 스피노자 철학 체계에 맞춰서 어떻게든 대결을 시켜야 속이 풀려서ㅋㅋㅋ

 

- comexio verum 이라는 표현이 있다. 상당히 오래된 표현이다. 고대 스토아학파 이래로 계속 전승되어 내려온 용어다. connection of things 저게 뜻하는 바는, 만물은 다 연결되어 있다. 만물의 연관, 만물의 연관성. 실재들의 연관. 사물의 연관. 그래서 매우 익숙한 표현인데 17세기는 과학혁명이 일어난 시기이고, 자연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이 생긴 시기인데, 새로운 과학 혁명의 요체는 기계론적 세계관, 질적으로 상이한 사물들을 양으로 환원해서 통일된 법칙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역학적 세계관. 이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만물의 연관은 아주 시대착오적 생각이었다. 만물의 연관은 모든 사물을 한데 끌어 모았다가 퍼지게 하는, sympathy로 모였다가 antipathy로 헤쳐졌다가 하는, 밑바닥에 우리가 모르는 숨은 원리가 있고, 우리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 밑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사물을 움직이는 기운이 있다는 것까지 이어진다. 이를 테면 동양의 ’기‘나 5부 서문에 나오는 오컬트 퀄리티 같은. 기계론적 세계관은 저것을 거부한다. 스피노자는 과학혁명을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인데 그런 그의 철학에 ”만물의 연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이 단어를 쓰고 있지만 아마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해서 새롭게 쓰고 있는 것일 확률이 훨씬 높다.

 

* 정리7은 이른바 ’평행론paralleism 명제라고 불린다. 이때 평행론 또는 평행성이 가리키는 것은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 평행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평행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평행론’이라는 개념이 정리7을 규정하기에 적절한 용어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리7 자체에는 ”평행하다“는 말이 없다. ”같은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걸 왜 평행론이라고 할까?

- 사실 이 용어 자체는 스피노자가 사용한 말이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처음 사용한 것이다. ”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물체 안에 발생하는 것 사이에 완전한 평행성을 확립해놓았다“ 따라서 라이프니츠가 사용한 말을 스피노자 철학에 적용하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해 여러 의문과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그냥 대세에 따라ㅋㅋㅋ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마샬 게루도 ‘평행론 명제’라고 부르고 들뢰즈도 그렇다. 들뢰즈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스피노자의 정리7 평행론에 대해 무려 두 챕터에 걸쳐 서술한다.

- 이 두 사람뿐이 아니다. 최근 들어 약간 엉뚱하게 스피노자 학계에서 평행론 논의에 매우 공을 많이 들이며 설왕설래중이다. 그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 Yitzhak Melamed. 요즘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스라엘 출신의 스피노자 연구자이다. 박사논문으로 평행론 문제를 다뤘고 그것을 발전시켜서 책을 냈다. 재작년에는 한국에서도 평행론 문제를 가지고 박사논문을 쓴 철학자가 있었고,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연구자들이 평행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평행론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인 평행론이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정리7에서 말하는 평행론은 다중적인 평행론이다.

- 어쨌거나 여러 주석가들이 ‘평행론’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쓰지 않을 수는 없는데 약간 이상하다. 스피노자가 ‘평행론’이라는 말 대신 ‘같다’라는 말을 썼는데 우리가 꼭 평행론이라는 말을 써야할까. 어떻게 보면 평행론의 논의가 복잡한 이유는, 스피노자가 쓰지 않은 단어로 스피노자 철학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자꾸 뭔가를 덧붙이게 되고 왜곡 변형하게 되면서 그런 게 아닐까.

 

* “실재들의 연관”에서 우선 “실재들”이라는 개념에 주의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실재res는 연장속성에 속하는 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물체’라고 혼동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제시될 수밖에 없다

 

1) 실재들 = 물체들이므로 관념들은 실재들이 아니다.

2) 따라서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A라고 하자)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B라고 하자)과 같은 것이라면, 이때 “같음”은 A와 B라는 서로 상이한 연관 사이의 일치 내지 상응의 문제가 된다

3) 이렇게 되면 이러한 일치와 상응이 어떻게 가능한지 수수께끼로 남게 되며 이를 서로 무관한 두 질서 내지 연관 사이의 평행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관념은 사유속성이고 물체는 연장속성인데 1부 정리2(상이한 속성을 지닌 두 물체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에서 관념은 물체를 상정할 수 없고 물체도 관념을 상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하나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 독립적인 것. 한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가 다른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와 인과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 관념이 속한 사유속성과 물체가 속하는 연장 속성은 인과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독립적이다. 그러니 관념과 물체가 절대 같을 수 없다. 논리적으로 인과적으로 관념과 연장은 합치하지 않는데 이게 어떻게 합치한다고 하는 걸까.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정리7의 실재를 물체로 해석하면 안 된다.

 

4) 따라서 왜 스피노자가 정리7에 대한 증명에서 1부 공리4(“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를 제시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서로 독립적인데 왜 원인과 결과야,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5) 더 나아가 뒤에서 보겠지만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과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을 동일한 연관, 동일한 질서라고 말하는 것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정리7이 스피노자 체계에서 지닌 중요성에 비하면 이 정리에 대한 증명은 너무 간단하다.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공리4의 논점이 “원인지어진 것”, 곧 “결과”와 “원인”사이의 관계를 제시한다는 점에 유념해야한다. 이는 곧 스피노자가 A와 B가 “같은 것”이라고 할 때 A와 B의 관계가 원인과 결과라는 점을 가리킨다.

6) 따라서 “같은 것”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하는데, 이 ‘같다’는 것은 서로 외재적이고 (존재론적이거나 논리적으로 무관한) 두 개의 질서 내지 연관 사이의 일치 내지 상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니까 실마리는 “실재”라는 단어다. 물체만이 아닌, 관념도 실재, 신도 실재,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실재다. 물체로 한정짓지 않아야 한다.

 

* 2부 정리7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연의 인과적인 동일성을 표현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6에서 신을 “절대적 존재자, 곧 각자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로 규정한다. 속성들 각자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은 속성들 각자가 자율적이라는 것(스피노자의 전문적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성들은 외부의 어떤 것에도 제약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속성들은 서로 동등하다. 곧 속성들 중 하나가 다른 것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가령 사유속성은 연장속성에 비해 우월하지 않으며, 반대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정신을 비롯한 관념들)도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신체를 비롯한 물체들)에 비해 우월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듯 신 또는 실체의 절대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성이란 모든 것을 포함함을 뜻한다. 곧 신 또는 실체가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것은 실체가 각자 무한한, 각자 다른 것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체의 절대성은 실체의 절대적 동일성을 함축한다. (1부 정리11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그러나 이때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나 신을 하나의 개체, 더 나아가 인격적 개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또는 신은 자연 전체이지 이러저러한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다. 그리고 실체를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은 각자 자율적인 인과 연관 내지 질서이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해내는 인과관계들 전체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2부 정리7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을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은 동일한 하나의 연관 내지 질서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2부 정리7의 주석, ”우리가 자연을 연장의 속성 아래 인식하든 아니면 사유 속성 아래 인식하든 또는 그 어떤 속성 아래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발견한다“ 이 점은 3부 정리3의 주석에서도 다시 긍정된다.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은 하나다.“

 

2부 정리7의 또 다른 논점은 속성들 사이의 실재적 구별이라는 논점이다. 스피노자가 자연의 인과적 질서과 연관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속성들 사이의 구별을 배재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유와 연장 같은 속성들이 각자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고 따라서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자율성을 유지하는 한에서, 사유와 연장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 곧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 제약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런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 관계는 오직 각각의 속성 내부에서 전개될 뿐이다. 사유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정신과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신체 사이에도 아무런 인과관계 내지 상호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3부 정리2 ”신체는 정신이 사고하도록 규정할 수 없고 정신은 신체가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또는 그 이외에 (만약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나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신과 신체가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은 아니다.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듯이, 그리고 동일한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이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때로는 연장속성 안에서 표현되듯이, 인간이라는 통일체 역시 때로는 정신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함의하는 것 중 하나는, <윤리학> 2부 정리7의 주석이 말하듯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평행성“ 내지 ”평행론“이라는 말을 라이프니츠가 처음 사용했지만 이 개념은 스피노자 철학에 더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3중의 평행성

1) 양태들의 평행성 (관념과 그 대상(가령 물체)의 평행성) <- 이것이 평행한 이유는 2)

2) 속성들의 동등성/상동성 (사유속성, 연장속성...) <- 이것이 동등/상동하는 이유는 3)

3) 존재의 동일성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신의 사유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행위역량“. 연장속성에 포함되어 있는 물체들의 역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유속성에도 적용된다. 신의 ’행위역량‘을 신체적인 또는 물리적인 행위역량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행위 역량‘이라고 부른 것은 연장 속성을 통해 발휘되는 물리적인 행위 역량= 인과 역량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사유속성을 통해 발휘되는 인식 역량을 가리키기도 하며, 더 나아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다른 속성들을 통해 발휘되는 또 다른 행위 역량들을 가리킨다. 곧 이러한 행위 역량은 모든 속성들을 통해 표현된다.

 

이렇게 이해할 때 그 다음 문장처럼 이야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연장 속성 안에서 물체로 나오는 모든 것, 사유 속성 안에서 관념으로 나오는 모든 것, 알 수 없는 속성abc...등등에서 나오는 모든 것, 즉, 이 모든 각각의 속성에서 신이 행위적으로 결과로 산출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상적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표상적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형상적 실재성은 어떤 사물을 그 자체로 고려했을 때 그 사물이 지니고 있는 실재성을 가리킨다. 반면 표상적 실재성은 정신 안에 재현된 것으로서의 실재성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두 가지 실재성을 갖는다. 태양 자체의 실재성(태양계에서 제일 큰 항성 등등의 특성을 갖는 연장의 양태), 우리가 태양에 대해 갖는 관념의 실재성(정신 안에 재현된 것으로서의 태양). 전자가 형상적 실재성이고 후자가 표상적 실재성이다.

 

하지만 또한 관념들 역시 두 가지 실재성을 갖는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 : 사유 속성 내의 한 양태로서 고려되었을 때의 관념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 : 다른 관념에 의해 재현된/표상된 것으로서의 관념

 

따라서 마지막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신은 자신이 자신의 행위역량을 통해 산출한 모든 실재(이 실재는 형상적 실재를 의미)에 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 곧 모든 형상적 실재는 신의 관념 안에 그것과 일치하는 표상적 실재로 표상/재현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신은 자신이 절대적인 행위 역량을 통해 산출해내는 모든 형상적 실재들을 동시에 신의 관념 안에서 표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사유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동일한 질서 내지 연관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32에서 이런 말을 한다.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 idea 관념 ideatum ”그 대상이 되는 것“ 관념의 대상이 되는 관념이 표상하는 것.

 

즉, 정리7의 따름정리의 마지막 문장에서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2부 정리32의 증명도 따르면 신 안의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신이 형상을 산출할 때 그에 대한 표상도 같이 산출하고, 신 안의 모든 관념은 그 대상과 합치한다. 신은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통해 형상적 실재를 산출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의 표상적 실재도 산출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방식, 동일한 연관에 따라 ”합치“한다 (adaequatio 아다이콰치오 일치 상응. 지성 바깥의 관념과 사물이 딱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다) 그러니까 idea와 ideatum이 일치하면 진리다.

 

신의 사유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동등하다“도 참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aequalis 아이콸리스 영어로 equal 인데, 평등하다, 동등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같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니 여기의 동등하다는 것을 좁은 의미의 동등함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넓은 의미의 동등함, 수학에서 이야기하듯이 equal, 같다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논점과 부합하는 것 같다.

 

주석 좀 더 진행하기 전에 앞에서 우리가 보여준 것을 여기에서 상기해봐야 한다.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바로 이 점인 듯하다.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원인들과의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속성들에 대해서도 나는 이처럼 이해한다. 그리하여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지금으로서는 이를 더 명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1부 정의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를 조금 더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곧 여기에서는 1부 정의4에 나오는 지성이 ’무한지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무한한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하는 것은 바로 ”속성“이다. 그리고 연장과 사유는 각각 신의 속성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유이한 속성들)이다. 스피노자는 연장과 사유를 때로는 ”연장되는 실체“ 및 ”사유하는 실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1부 정의6 및 정리11에 따라) 모든 속성은 독자적인 실체를 구성하지 않고 유일한 절대적 실체로서 신에게 속하기 때문에, 연장되는 실체와 사유하는 실체는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며, 이 동일한 실체는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고 할 수 있다.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속성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만 알고 있는데 우리가 과연 신을 인식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이면 표본이 너무 작지 않은가. 여론 조사 할 때 5000만 인구 중에 두 명을 표본으로 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5000만도 아니고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우리가 두 개의 속성만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신의 본질을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이 정리7인 것이다(ㅠㅠㅠㅠ)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여론조사와는 다르다ㅋㅋ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알아도, 혹은 사유 속성 하나만 알아도 우리는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 앞 문장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실체가 사유속성으로도 표현되고 연장속성으로도 표현되는데, 이것은 양태도 마찬가지다.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가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듯이, 연장에 속하는 양태와 그 양태의 관념 역시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곧 이것은 때로는 연장을 통해 표현되고 때로는 사유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단 이것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다.

 

더욱이 연장에 속하는 양태와 그 양태의 관념 사이의 동일성은, 하나의 개별 양태에 속하는 어떤 특별한 성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사이의 ”같음“ 또는 ”동일성“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2부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신체와 신체에 대한 관념으로 이루어진 양태고, 인간은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정신으로 때로는 연장 속성 안에서 신체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

 

이것은 3부 정리7로 가면 코나투스로 표현된다. 3부 정리9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가 정신과 신체로 동시에 표현되는 것이 욕구이고, 정신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의지라고 한다.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인간적 본질로서의 욕구가 신체를 통해서 표현이 되기도 하고 정신을 통해서 표현이 된다, 즉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때 스피노자가 코나투스라고 부르는 것은, 따름정리의 표현대로 하자면, 바로 행위역량, 또는 동일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이다

 

정리7의 주석의 저 문장을 잘못 읽게 되면 굉장히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이것을 가령 인간의 정신과 신체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사건과 그 사건에 상응하는 정신 안의 관념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테면 신체라고 하지만 신체의 수준이 다 다른데, 아주 미시적인 수준으로 들어가면 세포가 있겠고, 그렇다면 이 세포가 죽으면 정신 안에 이 세포의 죽음을 인식한다거나 이 세포의 죽음을 애도하는 관념이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에 봉착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포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저 문장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에 다 1:1 상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가 다 상응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스피노자가 하려는 말은 그것과는 다르다.

 

주석의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을 이어서 다시 보면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존재하는 모든 양태는 일종의 관념을 다 갖고 있다. 인간이 신체와 더불어 정신을 갖고 있고, 이것이 하나의 동일한 양태를 구성하는 것처럼, 자연 안에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들을 다 갖고 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무생명체도.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 ” 다른 개체들-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데, 그러니까 인간을 제외한 다른 개체들, 무생명체까지도 상이한 정도이기는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있다는 말이다. 무생명체가 과연 어떤 식으로 정신화되어 있는지, 스피노자의 정신화가 뜻하는 바가 뭔지 논쟁이 분분하지만, 2부 정리7에 따르면 저럴 수밖에 없다. 왜냐면 실재가 때로는 연장 속성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사유속성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다른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동일한 실체, 또는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이듯이, 자연의 통일성이 그렇듯이, 양태들의 경우에도 하나의 동일한 양태가 때로는 연장속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유속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한 양태도 때로는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체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욕구를 갖고 있듯이 다른 사물들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양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의 동일한 인과연관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스피노자가 정리6의 따름정리에서 속성으로부터 양태들이 따라 나온 방식은 동일하고 동일한 필연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정리7에서도 하나의 동일한 욕망, 하나의 동일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어떤 면에서는 일양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어떤 히브리인: 그냥 마이모니데스가 그랬다고 말해도 될 텐데ㅋㅋ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 스피노자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내지 연관을 더 정확히 “원인들의 연관”이라고 제시한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는 질서와 연관은 “원인들의 질서” 내지 “원인들의 연관”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원인들과의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속성들에 대해서도 나는 이처럼 이해한다. : 이것은 유일한 실체로서의 신이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에서 표현되고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에서 표현된다고 말할 때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는 것은 한편으로 인과 관계는 각각의 속성 내에서 그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사이에서 전개된다는 점(관념은 관념끼리, 물체는 물체끼리 등).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원인들의 연관은, 신이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연관 내지 질서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결과로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스피노자는 2부 정리7에서 1부 정의1의 자기원인 개념을 풀어쓰고 싶었던 것 같다. 1부 정리25의 따름정리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 곧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이점에 대한 증명은 정리15 및 정의5로부터 명백하다.” -> 신이 만물을 생산하는 인과작용은 신이 자기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작용이다. = 신은 만물을 생산할 때 만물을 제약하거나 한정하지 않았다. 만물을 원인으로써 산출한다(만물에게 원인으로서의 역량이 있게 산출한다) 만물이 능동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만물에게 능동적인 주체로 행동할 수 있는 달란트를 주었다 정도의 표현이 되겠다.

 

사유속성의 관념a 관념b 관념c .......

연장속성의 물체a 물체b 물체c ..........

A속성의 Aa Bb Cc ...........

B속성의 Ba Bb Bc...........

-> 관념abc의 연쇄, 물체abc의 연쇄, Aabc, Babc의 연쇄, 이 모든 연쇄들은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다.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의 연쇄이기 이전에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다. 그러니까 “원인들의 질서와 연관”은 한 속성 안에서가 아니라 “모든 속성” 안에서를 의미한다. 들뢰즈의 3중 평행성의 표현을 빌면 평행론의 근거는 존재의 동일성. 실체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이 존재하기 때문에 속성들 사이에 동등성과 상호성이 성립하고, 속성들 사이에 동등성이 성립하기 때문에 양태들이 관념A-물체A 관념B-물체B가 상응하면서 양태들의 평행성도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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