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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일상

 

* 최근 스피노자 철학에 관심이 많아지다 보니 사회과학에서 이 ‘포텐시아’를 가져다가 ‘역능’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냥 ‘능력’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말인데, affection을 ‘정동’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것처럼 한국의 사화과학자들은 신조어 만드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새로운 개념이나 용어가 수입될 때 흔히 그렇듯이 포텐샤라는 스피노자 철학 개념의 번역어도 아직 확립되지 않은 가운데 이 두 가지 번역어가 서로 경쟁하듯 사용되고 있다. ”역능“”이라는 단어는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는 점에서 일차로 포텐샤의 번역어로 부적합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단어가 특별히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의 의미와 용법을 잘 표현해준다면 사용을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이 단어는 내용상으로도(이 점에 대해 곧 살펴볼 것이다)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번역어를 굳이 사용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렇게 신조어로서의 ‘역능’을 남용할 경우의 문제는, ‘말의 계보’의 측면에서의 혼돈이다. 스피노자만 포텐시아를 쓴 게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도 이 단어를 다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고, 니체의 Wille zur Macht를 불어로 쓰면 volonté de puissance, 여기서 ”puissance“가 바로 불어로 포텐시아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포텐시아에서 가져간 개념이다.

 

*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번역 문제에 부딪혔을 영어권의 예를 보자. potentia는 불어로 puissance 이탈리아어로 potentia, potestas는 불어로 pouvoir 이탈리아어로 potere, 이렇게 유럽어들은 라틴어의 개념을 살릴 수 있는 언어지만, 영어 같은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 power라는 단어 한가지 밖에 없다.

 

Edwin Curley의 <The collective words of Spinoza>(1985) 1권에는 <에티카>,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편지들이 실려 있다. 작년에 2권이 나왔다. 1권과 2권 사이에 30년이 걸린 것인데... 2권에는 <신학정치론>, <정치론>, 편지들, 스피노자가 쓰는 히브리어 문법 등이 들어있다. 아마 이 두 권을 다 번역하는 데에는 50년 가까이 걸리지 않을까... 그런데 컬리는 1권에서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일괄적으로 ”power“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이 번역에 대해 ‘유럽철학자들은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power면 충분하다.’라고 뒤에 덧붙였다. 그런데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이 없었던 1권과 달리, 2권에서 이것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학술대회에서 [troublesome term]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언급했다.

 

Antonio Negri <The Savage Anomaly>. 한국에는 <야만적 별종>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제목부터 이미 잘못 번역했다. 이 책은 네그리가 당시 스피노자의 철학은 서양 근대 철학계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별종 같은 철학이다, 정해진 틀로 설명이 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느낌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savage라는 말을 붙인, 그러니까 한국말로 번역한다면 ”야생의“가 훨씬 적합한 번역인데 이걸 ‘야만적”이라고 번역해버렸다. 네그리의 철학에서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네그리는 <포테스타스: 지배권력, 맑스 입장에서 보면 부르주아 권력 / 포텐시아: 다중, 민중, 민중의 해방된 힘>으로 해석한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서양철학 전체가

 

*** 포테스타스 노선: 부르주아 자본가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철학

-> “제국”을 정당화하는 사상이 되는.

대표적인 사람들: 홉스, 루소, 헤겔

*** 포텐시아 노선: 자본주의 질서를 전복하고 변혁하려는 철학 –> 다중 노선

대표적인 사람들: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맑스

 

이렇게 두 개로 분리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네그리 사상 전체를 뒷받침하는 핵심개념이 포테스타스, 포텐시아이기 때문에 그에게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네그리의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Michael Heart도 아마 이 단어를 어떻게 구분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아마 한국의 학자들이였다면 신조어를 막 만들어냈을 텐데, 유럽이나 미국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하트는 고민 끝에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어떻게 구분하냐면 포텐시아의 power를 대문자 Power로 쓰는 방법을 택했다.

 

그럼 컬리는 어떤 해법을 제시했을까? 컬리는 apostrophe 아포스트로피를 붙인다. 포테스타스에 아포스트로피를 붙여 power’라고 표현.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이 저것들을 보면 얼마나 답답할까. 말 하나 그냥 만들어내면 되지, 신조어 하나 만들어서 영어를 풍부하게 만들면 되지, 이렇게 생각할 듯...ㅋㅋ 

 

아무튼 포텐시아라는 말에는 네그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해서 굉장히 긴 역사가 있는데 저걸 이상한 신조어로 다 번역해버리면 같은 포텐시아가 다른 말의 갈래로 나뉘면서 “말의 계보”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이게 오래된 용어라는 것도 모르고 스피노자만 쓰는 단어라고 착각하기도 쉬워진다. “말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스피노자는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데카르트 철학이나 스콜라 철학에서 쓰던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새로운 의미의 말로 바꾸어낸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 potentia과 권능/권한/권력 potestas>

 

존재론-신학적 의미

 

존재론-신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은 대립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곧 포텐샤는 합리적으로 인식된 신의 본성을 나타내며, 포테스타스는 신의 본성에 대한 상상적이고 미신적인 견해를 타나낸다.

 

* 포텐샤

 

1) 첫 번째 규정은 포텐샤를 잠재력, 실행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상 현행적인 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 신이 역량을 갖고 있는데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기존의 역량을 되풀이 한다는 의미 아닌가. 그럼 신이 퇴보하거나 적어도 정체되어 있다는 말 아닌가. 신에게는 잠재태가 없으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 정확히 말하면 신에게는 새로운 것이라는 게 없다. 1부 정리16에서 봤듯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데, 그 무한하게 따라 나오는 것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파악할 수가 없다. 신에게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잠재태”가 있었다는 말인데 VS 신에게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미 다 했으니까 잠재태가 없다는 것인데,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스피노자가 보는 신의 능력이다.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나온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세계 모든 우주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즉, 우리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 신에게서 나왔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니까,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가 있는 곳에서 사니까 시공간을 따지는데 신은 그런 걸 따질 수 없다. 스피노자가 상정하는 신의 차원에서는 논리적 가능성과 시공간의 한계 사이에 아무런 괴리도 생겨나지 않는다.

 

2) 두 번째 규정은 신과 피조물 또는 자연 실재들 사이에 초월적인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모든 실재들의 실존 및 행위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점을 주장

 

만물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 따라서 신은 항상 능동적일 뿐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신에 의해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 역량을 부여받은 모든 자연 실재는 항상 최소한의 포텐샤, 곧 원인으로서의 능동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 1부학 1부가 “본성으로부터 아무런 결과도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정리로 끝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 따라서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표준화된 현실태-가능태의 구분법을 해체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포테스타스

 

- 초월자(이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 포텐샤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에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는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의지의 무한성에 의존한다는 점.

- 스피노자는 이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다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런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1부 정리33 주석2

- 신의 포텐시아를 자유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신의 임포텐시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2.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

 

-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의 용법이나 관계는 존재론-신학의 경우와 좀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인간학의 영역에서는 유한한 자연 실재로서 인간이 문제이므로(존재론-신학의 영역에서는 주인공이 신이었다면), 포텐샤 개념이 항상 능동적이고 현행적인 의미를 갖기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포텐샤는 코나투스로 표현되며, 이러한 코나투스는 모든 자연 실재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된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코나투스는 욕구 또는 욕망으로 제시된다. 이처럼 코나투스나 욕망으로 규정되면 포텐샤는 항상 능동적인 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향적인 차이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는 길이다. <윤리학> 3부 이하의 논의는 이처럼 인간이 수동적인 정서 또는 정념들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는 상이한 쟁점을 갖게 되는데, 핵심적인 것은 정신 또는 의지에 대한 신체 활동의 종속이라는 문제다. 이는 특히 윤리학 3부 정리2의 주석과 5부 서문에 잘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2의 주석에서 두 가지 대립항을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으로서,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이며, 이것은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또는 연장 속성 아래서 인식된다. 이로부터 실재들의 연관과 질서는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는 간에 하나이며, 따라서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우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그러니까 정신이 능동이면 신체도 능동, 정신이 수동이면 신체도 수동으로 같이 비례해서 간다는 것.

 

반대로 스피노자의 가상의 적수들은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가 상반되며 더 나아가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포테스타스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신체의 힘이 너무 커지면 정신이 압도된다고 생각했다. 의지력 같은 정신이 커져서 신체를 통제한다는 개념으로 이해 <- 반비례 관계. 데카르트가 특히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니까 누가 너무 수다스럽거나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면,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정신의 포테스타스가 약한 것이다. 정신이 신체를 통제 못하는 상태.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후자의 관점은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상에서 유래한다. 곧 정신이 내리는 결단이나 신체의 행동이나 모두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또는 인간적 표현인 욕망에서 생겨나지만, 가상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정신에 고유한 포테스타스, 또는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랄한 표현에 따르면, 젖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의지로 도망친다고 믿고,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유의지로 지껄이고 있다고 믿는 것.

 

스피노자는 5부 서문에서 스토아학파 및 데카르트, 특히 <정념론>의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가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곧 이들은 “정서들이 절대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존하고 우리는 정서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믿고”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송과선(뇌 안에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가 결합하는 부분)이라는 ”은밀한 성질“로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지배력, 포테스타스를 확립하려고 시도하도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가상 또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작용을 규정하는 것은 동일한 코나투스이며,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우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간다는 점“을 인식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학-윤리학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 관계의 쟁점은, 신체에 대한 정신 내지 의지의 권능으로 표현되는 포테스타스의 관점이 우리의 인간학적 조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로막고, 이에 따라 윤리적인 능동화의 과정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 어떻게 수동성을 줄이고 능동성을 높일 것인가, 윤리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정신과 신체의 역량을 어떻게 확장시키고 능동화시킬 것인가. 스피노자의 중요한 화두

 

3. 정치학적 의미

 

앞에서와 달리 정치학의 영역에서 두 관계는 대립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고 비제도적인 또는 선제도적인 행위 능력으로서 포텐샤와, 법제도에 의해 부여받은 권력 또는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곧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는 법적 제도적 질서의 존재론적 기초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의 자연적 시초를 표현한다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에 따라 규정된 행위 능력이나 권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 내지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는 자연 상태에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오직 주권이 존재하는 국가에서만 부여받고 행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도로를 걸어갈 수 있는 자연적 역량, 포텐샤를 지니고 있지만 교통법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권한, 포테스타스는 갖고 있지 않다.

 

국가 전체의 차원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대중들의 포텐샤와 주권, 곧 최고의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 사이의 관계로 표현된다. <정치론>3장 2절.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는 존재론-신학, 인간학-윤리학의 영역과는 달리 대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법과 제도가 없이는 역량이 제도화되거나 공동의 정치권력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텐샤의 철학, 곧 역량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적절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처럼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관계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 그가 저술한 <야생의 별종- 바루흐 스피노자에서 권력과 역량에 대한 고찰>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걸작 중 한권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처음으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다중 multitudo이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해명했으며(‘다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별도의 항목으로 다룰 것이다),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핵심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 책에서 역량과 권력 사이의 대립을 스피노자 철학, 더 나아가서 근대 사회 자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축으로 삼는다. 네그리는 한편으로 권력의 노선, 곧 홉스에서 루소를 거쳐 헤겔로 이어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노선과 다른 한편으로 역량의 노선, 곧 마키아벨리에서 스피노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다중의 역량의 노선을 대립시킨다. 네그리에 의하면 근대성이라는 것은 ”서양 합리주의의 선형적 발전도, 서양적 이성의 운명도 아니“며, ”자유로운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지배 사이에 항상 양자택일이 존재해 온 모순적인 전개과정“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대중의 자유로운 생산력과 자본주의적인 지배관계 사이의 또는 역량과 권력 사이의 대립 노선이 서양의 근대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을 구조화한다. 스피노자 철학의 중요성은 다중의 역량의 존재론과 정치학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네그리 해석의 문제점은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관계, 또는 다중의 역량 대 지배 권력- 또는 구성/제헌 권력(constituent power) 대 구성된 권력(constituted power)–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관계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외재적 대립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에 낯선 관점일 뿐만 아니라 제도 바깥의 대중운동과 제도적인 정치영역 사이의 갈등적/변증법적 관계를 파악하는 데도 적절치 못한 관점이다.

 

* 구성/제헌 권력 대 구성된 권력 pouvoir constituant VS pouvoir constitué

 

그러니까 구성/제헌 권력 대 구성된 권력. 이게 바로 정치학적인 의미에서 콘티스타스의 용법이다. 스피노자가 최고의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는 다중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라고 했는데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가 바로 숨마 포테스타스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다중의 역량 대중들의 역량 power of multitude(multitudo)

 

pouvoir constituant

pouvoir constitué

 

이것은 현대법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인데,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신부인 시에예스 Emmanuel Sieyes가 1789년 2월,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의 해에 발표한 [제 3신분이란 무엇일까]라는 논문에서 도입한 구별이다. 100쪽 남짓 되는 얇은 책인데, 여기서 시에예스 신부는 제3신분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의 주체라고 주장하고, 신부가 이 책을 딱히 혁명적인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프랑스 혁명의 아버지가 된다ㅋㅋ 여기서 도입한 굉장히 중요한 구별이 바로 저 두 가지.

 

영어나 불어에서 constitution이라는 말은 중의적이다. 구성이라는 뜻과 법학적인 의미에서 헌법이라는 뜻,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constituant은 제일 일반적인 뜻으로 이야기하면 구성하는 권력, 구성하는 힘이지만 이 단어에는 헌법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이중의 의미가 다 들어가서 헌법을 구성하는 힘, 헌법을 구성하는 권력이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제헌권력.

 

시에예스가 여기에 쌍으로 쓰는 것이 pouvoir constitué이다. 이건 과거분사형으로 썼는데 영어로 하면 constituded power. 그러니까 이미 헌법이 제정되고 난 다음에 헌법에 따라 실행되는 힘, 권력이라는 의미다. 구성된 헌법적인 힘.

 

이를테면 촛불 시위에서 표현되는 것이 말하자면 pouvoir constituant다. 기존체계를 무너뜨리고 무언가를 설립하고 제정하는 그런 힘. 반면에 이렇게 해서 새 정권이 들어서고 개헌을 해서 새로운 헌정질서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게 바로 pouvoir constitué다. 새롭게 국가가 수립되면 그것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힘.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권은 촛불집회 정신에 입각했다라며 촛불집회의 의미를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다”라고 했는데, 사실 헌법 1조 2항에 보면 주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그렇다면 문재인이 말한 국민주권의 시대를 연 ‘국민’, 헌법 1조 2항에서 말하는 ‘국민’은 constituant로서의 국민일까 constitué 일까.

 

법학적인 의미에서 보면 후자다. 제정된 헌법에 입각한, 거기에 기초를 둔 권력. constituant는 아주 이상한 개념이다. 이것은 헌법에 표현될 수 없는 권력이다. 정의상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헌법을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는, 그래서 헌법으로 포괄이 안 되는 힘. 그러니까 헌법 입장에서 보면 유령 같은 힘이다. 헌법을 가능하게 한 힘이지만 헌법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저걸 표현하는 순간 헌법은 자기의 외부, 자기의 바깥을 자기 안으로 들여와야 하니까. constituant 해당하는 것이 ‘혁명’ 같은 것이지만 헌법이 그것 자체를 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결성인데, 완결적이고 내재적이어야 하는데 법이 저것을 담게 되면 자기의 완결성을 부정하게 되는 셈이 된다.

 

스피노자의 포텐시아라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대중들의 역량, 다중의 역량이라는 게 바로 constituant.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다중의 포텐시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루소식으로 말하면 인민, 일반의지, 인민주권 같은 것이다. People's sovereignty. 여기서 이 “people”이라는 말이 참 애매한 말이다. constituant의 주체일 수도 있지만 constitué의 주체일 수도 있는.

 

아무튼 네그리는 이 포텐시아를 민중의 해방적인 힘이라고 부르고 포테스타스를 지배권력이라고 했는데 스피노자의 용법과는 다르다.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스피노자의 구별법은 오히려 세이예스의 구별법이랑 비슷하다.

 

시에예스의 구별법을 가져다가 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라는 초기 논문에서 법 정초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이라고 변형해서 쓴다. 이때 폭력이라는 단어는 gewalt. 게발트는 한국어의 폭력보다는 뜻이 더 많다. 이 게발트는 스피노자식으로 하면 포테스타스이기도 하고, 교회가 갖고 있는 영적인 권능이라고 할 때도 게발트를 쓰고 법적인 권한을 말 할 때도 게발트라고 쓴다. 물론 벤야민의 저 구별법이 시에예스의 구별법과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법 정초적 폭력

법 보존적 폭력

 

벤야민 논문을 보면 이 구별은 벤야민의 여러 구별 중에 그냥 한 가지 구별이다. 사실은 벤야민은 글의 뒷부분에 가서 신화적 폭력/ 신적인 폭력을 다시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신화적 폭력이라는 것은 권력을 목표로 하고 신적인 폭력이라는 것은 정의를 목표로 한다. 이런 구별을 염두에 두면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인 폭력이라는 것은 법 정초적 폭력 중에서도 신화적 폭력을 제외한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 순수하게 정의로운 힘, 그것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는데ㅋㅋㅋ 하여간 이것은 뭔가 새로운 권력, 새로운 법질서를 구현하려고 하기보다는 오로지 정의를 추구하는 힘이다.

 

그러니까 벤야민에게 법 정초적 폭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어떤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정의로운 어떤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끝나고 나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많은 신생국들이 생겨났다, 민족의 해방운동을 통해서.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 그게 어떤 의미에서 보면 법 정초적 폭력이다.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등장한 힘. 여기서 비극인 것은, 제국주의를 무너뜨린 이 민족해방운동, 독립투쟁의 영웅들이 새로운 나라를 구성한 뒤에는 대개 독재자로 변모했다. 거의 예외 없이. 그래서 신생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독립국가들이 독재국가로 변질되거나 아주 오랫동안 내전을 경험하게 된다. 대표적인 나라가 알제리. 알제리가 프랑스에게서 반 식민투쟁을 해서 힘겹게 독립을 했는데 독립하자마자 20년 넘게 내전에 들어가서 독립투쟁 당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만 봐도 법 정초적인 폭력이 해방적이거나 긍정적인 힘이다, 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런데 네그리는 이런 걸 너무 무시한다. 포텐시아, 그것을 그 자체로 해방적인 힘이라고 이야기 해버리기 때문에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변증법이 들어갈 여지가 네그리 철학에서는 많지 않다.

 

* 다시 번역에 대하여-

 

우리가 포텐샤를 “역량”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스피노자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시대는 거대한 과학혁명의 시기였고, 이러한 혁명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는 데 있었다.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인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성”이나 “실재성” “완전성”이나 우리의 주제인 포텐샤 같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정도”나 “완전성의 정도” 또는 “포텐샤의 차이”(곧 “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철학적인 어휘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성” 같은 관념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윤리”의 영역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포텐샤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리키기보다는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상호비교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텐샤라는 용어는 “역량”이라는 말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정리4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 2부 정리3과 정리4는 스피노자 철학의 용법대로 하면 무한양태에 관한 이야기다. 특히 사유속성에 속하는 무한양태에 대한 이야기

- 스피노자가 편지에서는 ”무한 지성“이라고 썼는데 에티카 정리4에서는 ”신의 관념“ idea Dei 이데아데이 idea of God이라고 썼다. 이것도 번역할 때 조심해야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갖는) 신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의 관념을 말한다.

 

– 정리4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신의 관념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관념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스피노자 용법대로 하면 신의 관념은 직접적 무한양태니까 다시 바꿔서 말해보자.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에티카 원문을 봐도 대명사로 표현되어있지 지정이 되어있지 않다. 일단 1) 상위개념인 실체나 속성은 아니라는 것, 2) 양태로부터는 양태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무한한 것은 무한한 것으로부터만 따라 나오기 때문에 유한양태도 아니라는 것(무한한 것에서 유한한 것이 나온다라고 하면 이건 그 이전의 창조론으로 가야한다ㅋㅋ)

- 그렇다면 무한양태인가? 그런데 그러면 또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무한양태가 무한하게 많다는 결론이니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상하다

 

* 첫 번째 이상한 점

 

- 1부 정리21의 증명을 보자. ”사유속성 내의 신의 관념을 예로 들어보자“ <- 여기서 벌써 사유속성 안에 있는 신의 관념을 직접적 무한양태의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신의 관념은 사유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다.

- 문제의 그 슐러의 편지. 슐러에게 보내는 스피노자의 답이 스피노자 입으로 직접적 무한양태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답하는 유일한 대목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불확실하다. 무한양태에 이것만 있다고 말하는 건지, 무한양태에 다른 어떤 사례들이 더 있는데 이것만 예로 들어 이야기한 건지 여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 스피노자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라는 말을 쓰는 경우인 1부 정리16을 다시 보자.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곧 무한 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이 ”무한하게 많은 것들“에는 사유속성에 속하는 것들, 연장속성에 속하는 것들, 그 밖의 속성a 속성b 속성c... 등등에 속하는 것들이 다 들어간다(“모든 속성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신의 절대적 본성에서부터 따라 나온다“)

- 즉,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들“과 ”신의 본성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무한하게 많은 것들에는 사유속성, 연장속성,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a b c 속성들도 다 들어가고, 이것들이 다 신의 절대적인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그래야 신의 역량이 절대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신 자체인 경우에는 이해할 수 있는데, 정리4에서는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의 관념만이 문제가 된다는 것. 사유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가 문제가 된다는 것. 어떻게 한 속성에 속하는 양태로부터 어떻게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 다시 말해서 1부 정리16에서 벌써 ”무한지성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무한지성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은 사유속성, 연장속성, 속성 abc... 등등. 그러니까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올 수 있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 지성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신의 관념은 사유속성 안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이다. 그러니까 이상한 것이다. 이것은 한 속성 안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데, 어떻게 한 속성 안에 속하는 이 양태 안에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들 많이 아니라 연장속성에 속하는 것들, 속성 a,b,c... 등등에 속하는 것들까지 다 여기 이렇게 들어온다, 따라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가.

- 그렇다면 우리가 사유속성에 속하는 신의 관념이라는 직접적 무한양태 대신에 연장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 운동과 정지를 놓고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운동과 정지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벌써 관념들이 연장속성에 속하는 이 물체들이 따라 나오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지 않나. 그러니까 운동과 정지로부터 따라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물체들만이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유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 신의 관념으로부터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 1부 정리16에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이미 했고 정리4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속성은 아닌데 사유속성만 대체 왜? 왜 신의 관념에 대해서만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왜 사유속성만 이런 특권을 누리는가? 다른 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는데 왜 신의 관념만.

 

* 두 번째 이상한 점

 

- 1부 정리21과 23에서 알게 된 것은 무한한 것에서는 무한한 것만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신의 관념이 무한양태니까 무한한 것이 따라 나올 것이고, 신의 관념이 양태니까 무한하게 많은 속성일 수는 없고 무한하게 많은 양태가 따라 나올 것이다. 무한양태. 그런데 지금 무한양태가 무한하게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무한양태는 무한하게 많다고. 그냥 무한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다고. 이것도 이상하다.

- 슐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딱 세 가지만 예로 들고 있다. 직접적 무한양태로 신의 관념, 운동과 정지, 우주 전체 이렇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걸 두고 스피노자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데,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이런 논의의 전제는 무한양태가 딱 네 개있다, 세 개 아니면 네 개 있다인데ㅋㅋㅋ 그런데 지금 정리4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마치 무한양태가 3개, 4개가 아니라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무한하게 많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사유속성, 연장속성, 속성a, b, c... 등등의 속성이 있고, 거기에도 각각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무한하게 많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냥 무한하게 많다고 하지 않고,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다고 하니까 그것은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에도 스피노자가 사례로 들지 않은 무한양태의 종류가 더 있다, 그것도 몇 종류 더 있는 게 아니라 무한하게 많이 더 있다, 이런 말인데, 아니 그게 대체 뭐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 실마리 <소론>

  

스피노자가 초기저작에서 신의 관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하나 있다. <소론>.

소론의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록을 보면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연 또는 신은 1), 그에 대하여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말해지고, 그 자체로 창조된 실재들의 모든 본질을 포함하는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2), 이 모든 것 3)에 대하여 사유 속성 안에서 무한한 관념 4), 곧 자연 전체를 존재하는 그대로 표상적으로 그 자체 안에 포함하는 관념이 산출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1) 에티카에서는 ‘신 또는 자연’이라고 하는데 소론에서는 ‘자연 또는 신’

2) 여기서도 신은 하나라고 말하며 신을 정의한다.

3) 이 모든 것 :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과 창조된 실재들의 모든 본질

4) 이 무한한 관념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관념, 여기서대로 하면 신의 관념

 

- 신의 관념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이다. ”이 모든 것“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과 창조된 실재들의 모든 본질“을 다 포괄한다. 여기서 주목할 말, 2부 정리4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론에는 나오는 말 ”표상적으로“ 1부에서 여러 번 봤던 표상, objectiva. 그러니까 우리가 1부 정리16에서 ”무한지성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라고 표현했을 때 이 ”들어온다“는 말이 소론에서는 ”표상적으로 그 자체 안에 포함된다“로 표현되어있다. 그러니까 ”무한지성 안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는, ”표상적으로 들어온다“라는 이야기다, 이 표현법대로 하면. 소론의 그 다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때문에 나는 또한 이 관념을 1)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된 피조물 2)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체 안에 모든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을 누락이나 추가 없이 표상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단지 하나만 존재하는데,4) 속성들의 모든 본질 및 이러한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양태들의 본질들이 단 하나의 무한한 존재의 본질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5)

 

1) 무한한 신의 관념을

2) <소론>에서는 아직 ”창조“ ”피조물“이라는 창조론의 용어를 쓰는 흔적이 남아있다. <에티카>에서는 ”따라 나온다“, 편지만 봐도 ”산출된“이라고 말하는데. 아무튼 저 창조적 피조물이 가리키는 것은 직접적 무한양태라는 말이다.

3) 다음 시간에도 보겠지만 2부 정리7과 그 이후부터 형상적, 표상적이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용어다. 여기서도 말한다. ”신의 관념은 그 자체 안에 모든 실체들의 형상적 본질을 누락이나 추가 없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의 관념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포함하냐면 ”표상적으로“ 포함한다.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 포함한다-> 관념으로 포함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념으로서 포함한다.

4) 즉 신의 관념은 하나만 존재하는데

5) 왜냐면 그것은 속성들의 모든 본질들이 신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표상적으로 포함하는 신의 관념은 단 하나다, 이런 이야기다.

 

2부 정리4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신의 관념은 단 하나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2부 정리4가 <소론>과 달라진 점이 뭐냐면 ”표상적으로“라는 말의 여부다.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라고 “표상적으로”를 넣으면 소론의 이야기하고 거의 똑같다.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관념으로서 따라 나오는. 그러니까 형상적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지만, 표상적으로 보면 모든 것은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관념으로서 따라 나오는. 이렇게. 그러니까 형상적으로 볼 때는 모든

 

- 신의 관념이 모든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포함한다

- 무한하게 많은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라고 할 때는 그건 형상적으로 따라나온다기 보다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사실 정리4 이하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 바로 형상적, 표상적의 용어의 의미와 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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