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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밤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인생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이 한꺼번에, 어이없이 먹구름처럼 인생을 온통 뒤덮는 순간. 문학적으로 볼 때야 이만큼 멋진 쓸거리가 있을 리 없겠지만, 한 개인에게 그것은 결코 되돌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자리를 떨치고 새로운 국면을 헤치고 나가는 씩씩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곳을 결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되풀이 되는 함정에 자꾸만 빠져든다.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서로 함정을 놓고 계략을 꾸미고 변명하고 도망하려 하지만 매번 실패하는 이들은, '가족'이다.

보살핌이 감시가 되고, 사랑의 강도가 그만큼의 원한으로 돌아오는 관계를 뉘라 하여 지속하고 싶어할 것인가. 그래도 기를 쓰고 번번히 갱신하고, 기꺼이 감당하는 관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가족이라고 오닐은 말한다. 실패의 순간을 함께하고 위로하는 이들도 가족이지만, 그것을 평생 조롱하고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가족이다. 해설에 따르면, 오닐에게 이 희곡은 그의 개인사가 가장 밀접하게 반영된 작품이라 하는데, 좀 어이없지만 그것을 읽고  어느 정도 위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을 읽고 나서 느낀 절망과 슬픔이 작가가 평생 짊어져온 실제 '피와 눈물'의 기록이라는 것, 그래서 인간은 또한 혼자가 아니라는 데서 느낀 약간의 따뜻함 때문이었다. 비극이라는 장르에서 희망을 만나는 것, 그리고 작품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북유럽 드라마에서 꽃피기 시작한 모던함의 영향 하에 극을 쓰기 시작했다는 오닐은 무대 위의 실시간과 공간을 서서히 심리의 시공간으로 바꾸어놓는다.  인물들의 관계망이 촘촘해지고 심리의 구도가 정교해짐에 따라  극의 물리적 시간과 내적 시간은 서로 점점 더 멀어진다. 극이 시작하는 아침의  메어리와 마지막 장인 밤의 메어리는 다른 인간이다. 한 가정주부인 그녀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고통이 없고 희망만으로 충만했던 처녀 시절로 퇴행하고, 그것을 걱정하면서도 한편 조장했던 자신들의 비겁한 과거를 벗어던질 수 없는 다른 가족들에게는 무겁고 떨칠 수 없는 밤의 안개만이 남는다.

고통을 함께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지만, 가장 무서운 말이다. 밤으로 긴 여행을 떠나기까지 함께한 사람들, 바로 우리의 곁에 머무르고 있는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바친다는 작가의 헌사가 가슴 아프고, 슬프고, 그만큼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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