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이면 엄마 손을 잡고 대중목욕탕을 갔었다. 엄마는 일찍 가야 물이 깨끗하다며 해도 안 뜬 새벽에 깨우곤 했었다. 엄마와 나의 추억은 대학을 들어가서도 이어졌다. 이른 아침 목욕을 끝내고 나오면 목욕탕 앞에는 호떡을 파는 리어카가 있었다. 그렇게 엄마와 호떡을 하나씩 들고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일상의 어느 순간이든 익숙하게 느껴지는 공중목욕탕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이 책은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찾아준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학예사로 근무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목욕탕 문화를 연구했던 저자는 세계 목욕의 역사에서 우리의 목욕 문화까지 목욕과 관련한 역사를 소개한다. 지금의 목욕 문화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문명이 시작하면서 목욕을 하는 문화가 생겨났고 고대 로마와 이슬람을 거쳐 산업혁명을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는 각 지역별로 특징적인 목욕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다양한 주제로 역사를 접하지만 오롯이 목욕만으로 역사를 살펴본 건 처음이다. 내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공중목욕탕과 고대 로마의 공중목욕탕이 비슷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공중목욕탕을 쾌락의 공간이라 여기고 악마의 소굴로 여겼으며, 고인 물을 불결하게 여긴 이슬람은 탕이 없는 공중목욕탕을 건설했다. 또한 유럽에서는 중세 시대 흑사병이 창궐했을 당시 목욕탕이 폐쇄되었고 물이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씻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시대별로 청결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는 점도 새롭게 다가왔다.
저자는 한국의 목욕 역사도 설명한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목욕 문화는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에 따라 급격한 차이를 보였다. 고려 시대에는 성별과 나이와 관계없이 함께 개울에서 몸을 씻었던 문화였지만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적 규범으로 인해 남의 눈을 피해 몸을 씻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 시대 목욕 용품이 발달했고 가족 구성원별로 전용 대야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온천 사랑과 낯선 궁중의 목욕 풍경을 알아가는 재미까지 가득하다.
책에서 살펴본 과거의 목욕 문화와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목욕탕 풍경이 비슷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런 목욕 문화는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있던 목욕탕 굴뚝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나중에서야 유일하게 남아있던 목욕탕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오피스텔이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낡은 시설에 불평할 때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니 뜨뜻한 찜질방에 가고 싶어졌다. 한약 냄새 가득한 방바닥에 누워있으면 그야말로 천국일 텐데... 색다른 역사를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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