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 슬레이트 같은 소녀. '소녀'라는 개념의 희생양이 된 소녀. 이른 나이에 스러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어릴 적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소녀. 삼류 사진작가조차도 그 소녀가 영원히 소녀인 채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만 같았다.
소녀는 죽은 채로 태어났다. 그 사실에 구경꾼, 관음증 환자, 범죄자까지 모두 열광했다.
p. 18
영화학 교수인 보디 케인은 졸업한 고등학교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고 23년 만에 모교를 방문한다. 그리고 한 학생이 23년 전 일어난 '탈리아 사건'을 다르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하고 당시 살해당한 탈리아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당시 예쁘고 어리고 부유한 소녀의 죽음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피해자의 신상과 체포된 범인이 '흑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디 케인은 진범이 따로 있다고 믿었고 당시 탈리아와 불륜 관계였던 음악교사 '블로흐'를 의심한다. 사건이 일어난 1995년은 여자들에게 야만적인 환경이었다. 여성 동급생과의 신체 접촉을 빙고판에 그리며 게임으로 치부했고 태연하게 성기를 노출하며 성희롱을 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여성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지만 보디 케인이 진실을 찾아가던 그 시점에 남편이 미투로 고발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소설은 여성 혐오를 주제로 내세우며 과거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를 보여준다. 작가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를 교차로 보여주며 실제 범죄 사건을 풀어가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비틀린 젠더 의식과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정서를 내보인다. 살해당한 탈리아와 룸메이트였던 보디 케인의 시선으로 사건의 진실을 따라가는 과정은 처참하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성폭력과 성차별적 시각, 한 소녀의 죽음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광기는 낯설지 않다. 소설을 읽으며 내내 불편했던 감정은 현실에서도 비슷한 사건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이미 범인이 체포되어 감옥에 있지만 진실은 달랐다. 작가는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범인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어떻게 은폐시키는지 보여주며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특히 과거의 이야기는 내가 살아온 시대가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세월이 지난 만큼 아주 조금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젠더 문제와 관련하여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걸 상기시켜 준다. 또한 소설에 비추어 나 역시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미디어에 쉽게 휩쓸렸던 건 아닌지 돌아볼 수 있었다. 범죄 소설로서 속도감 있게 긴박하게 전개되지는 않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불편한 울림을 주는 정통 미스터리 소설이다.
당신의 이름은 세상에 나가려고 내 목구멍에 걸린 채로 4년을 기다렸다. 나는 오마르를 만나려고, 그를 마주 보려고 4년을 기다렸다. 달리 원하거나 기대하는 건 없었다. 그저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p. 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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